국민은행 군산지점 오거리 (신영1길, 영동로, 평화길, 약전안길, 싸전길)(중) 정상급 음악인 배출… 고 박판길 충남대교수 등 태어난 곳 옛 영동파출소 앞 왼쪽의 농방골목과 파출소 서쪽일대의 싸전거리, 약전안길, 그리고 중앙로 2가 옛 한일은행 골목에는 떡전거리 등이 즐비하게 있었던 왁자지껄한 시장통, 그 자체였다. 사람이 많으면 볼거리도, 얘깃거리도 많다고 했던가. 시장은 사람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공간이고, 이를 통해 사람의 심성을 알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아닐까. 사람들이 몰려들어 군산을 대표하는 상권의 메카 같은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전국 최고의 초등학교 밴드부가 있었고 유명 작곡가․ 유명배우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 이곳의 주변이다. 영동상가에서 나와 몇 십 미터만 옛 역전 쪽으로 향하는 평화길로 가면 아리울 스포츠 건물이 있는 곳이 영화배우 고 이은주씨가 태어나 고교까지 자랐던 곳이고, 중앙초 주변 어느 골목에서 '산노을'의 작곡가 고 박판길 충남대 음대교수가 초․중․고를 다녔던 곳이다. 이들 예술인들로 인해 예향의 도시 군산은 현재 진행형으로 굳건히 존재하고 있다. # 박판길 충남대교수의 고향… 군산 시향의 탄생 주역 <1 절> 먼 산을 호젓이 바라보면 누군가 부르네 산 넘어 노을에 젖는 내 눈썹에 잊었던 목소린가 산울림이 외로이 산 넘고 행여나 또 들릴 듯한 마음 아- 아 산울림이 내 마음을 울리네 다가왔던 봉우리 물러서면 산 그림자 슬며시 지나가네. <2 절> 나무에 가만히 기대보면 누군가 숨었네 언젠가 꿈속에 와서 내 마음에 던져진 그림잔가 돌아서며 수줍게 눈 감고 가지에 또 숨어버린 모습 아-아 산울림이 그 모습 더듬네 다가섰던 그리움 바람되어 긴 가지만 어둠에 흔들리네 - 산노을(유경환 작시․ 박판길 작곡․ 신영조 노래) - 고 박판길(1929~1998) 충남대 교수는 '산노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군산시 중앙로 5가 33번지에서 태어났고 해방직후 중앙초의 밴드반 반장을 지냈는데 이때 음악교사가 고 정회갑 서울대 음대 교수였다. 개복교회에 어려서 출석하면서부터 피아노를 쳤고 성가대원으로서 피아노 반주를 맡으면서 음악과 가까워졌단다. 어려운 생활여건을 이겨낸 그는 군산중에 진학해서도 밴드부를 지휘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6학년 때 '나뭇잎 배'와 군중 3년 '밤의 노래'를 작곡했을 정도다. 그는 대학 진학과 함께 고향 군산을 떠났다. 고교를 마친 그는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한 후 1962년 경복고 등에서 음악교사와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했다. 1968년 도미, 미국 시카고 음악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귀국 세종대 교수를 거쳐 충남대 (1981년)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했다. 산노을의 탄생은 본래 제자 유경환시인의 작품이었는데 여기에 음을 넣은 것이 오늘의 작품이다. 또 어머니, 골짜기의 불빛, 풀피리, 도라지꽃 등 20여곡도 유경환시인의 작품들을 편곡한 것이다. 그는 고향을 떠났지만 이를 자신의 음악적인 자양분으로 삼고 작곡했고 군산시향의 탄생에도 크게 기여를 했다. 군산시향의 탄생은 1979년 당시 서해방송 보도국장이었던 김병남 본사 회장을 만나 시향창단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김 회장과 지역음악계 및 지역유지들이 뜻을 모았으나 곧바로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하지만 1989년 충남대 예술대학장이었던 박 교수가 다시 고향을 방문, 재차 창단의 필요성을 주창하자 10여년이 지나 뜻을 이룬다. 그때가 1990년 8월29일이다. 박 교수는 초대 지휘자로 군산시향의 창단 기념연주회를 여는 등 오늘의 시립교향악단의 뿌리를 내리는데 헌신했다. # 군산음악의 저력… 최고의 초등학교 밴드부 탄생 해방 직후 군산은 미군 진주 등의 특성 때문에 밴드부로 유명세를 탔다. 미 군정청이 주관하는 전국밴드경연대회에서 우승, 미 주둔군사령관인 하지중장으로부터 부상으로 당시로선 최신식 브라스 밴드 일체를 받았단다. 그 주역들이 중앙초(당시 보통학교)와 부설초등학교 전신인 팔마초 출신이었다. 중앙초에는 김제출신 정회갑 교사(후 서울대 음대교수)가 지도, 박판길 교수 등을 가르쳤고 팔마초에는 최동옥 교사가 지도하면서 전국적인 유명학교로 부상했다. 정회갑(1923~2013)교수는 경성음악전문학교 1회생으로 서울대를 졸업한 후 1961년 모교 교수로 재직, 국악기와 서양관현악을 위한 협주곡과 변주곡을 시도했다. 즉 서양음악의 토대 위에 한국적 정체성을 구현해 나갔다. 윤이상, 이상근과 더불어 우리나라 진보적 성향의 작곡가로 잘 알려졌으며 서양창작음악계의 동향을 파악해 국내 현실에 맞게 재해석했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부원장을 역임한 그는 가곡 진달래꽃과 그리움, 독주곡 '가요고소곡' 등이 있다 사회주의자였던 최 교사는 얼마 후에 월북, 북한에서 상당한 지위에 오른 음악가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도철 전 군고교장이 과거 일본에 갔을 때 NHK에서 조우했지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회자되기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상급학교 진학과 함께 군중 밴드부를 만드는 주역으로 활동했고 후에 해군군악대의 창설멤버로 활약했을 정도였다. 해군군악대는 1946년 서울에서 군중 밴드부 출신이 주축이 돼 민간인 20명에 의해 조직(해군본부군악대)됐고, 같은 해 진해해안경비대(진해사령부)에도 민간인 16명이 참여, 해군군악대의 모체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교수와 활동하던 조종렬씨(지난해 작고)는 해군군악대에서 활동한 뒤 미8군 등에서 수 십 년 동안 음악인생을 이어갔고, 학업에 매진한 다른 이들은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기도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