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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은주의 성장의 공간… 예술혼 \'불소시게\'

국민은행 군산지점 5거리에서 옛 역전까지의 길은 구시장로와 평화길, 중앙로가 연결하는 도로이다.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4-07-25 10:35:11 2014.07.25 10:35:11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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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따라 골목길 따라 <23> 국민은행 군산지점 오거리 (신영1길, 영동로, 평화길, 약전안길, 싸전길)(하) 오! 수정, 카이스트, 연애소설, 태극기 휘날리며, 주홍글씨 등 출연   국민은행 군산지점 오거리에서 옛 역전까지의 길은 구시장로와 평화길, 중앙로가 연결하는 도로이다.   이 도로의 주변에서 가장 눈길을 끌고 있는 곳 중 하나는 흥보당이 있었던 공간일 것이다.   영화배우 고 이은주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업에 성공, 군산의 마르지 않은 금고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이은주씨가 영화배우로서 유아․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거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게 아리울 스포츠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영동로에서 평화길로 30여m만 옛 군산역 방향으로 내려오면 이은주씨와 그녀의 부모, 조부모가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다. 이씨의 할아버지는  염전, 양조장, 운수업, 시멘트 대리점 등의 사업으로 성공해 군산의 거부 반열에 올랐고, 할머니는 군산에서 유명한 금은방이었던 흥보당을 운영했던 부유한 집안이었단다.   이은주씨의 할아버지 이덕순(작고)씨는 일제강점기에 동경에서 상고를 졸업, 군산어업조합(군산수협)이사 등을 지낸 지역 경제계인사였다. 지인들에 따르면 그가 돈을 벌었던 것은 몸에 배인 근면함에다 쌍용시멘트의 군산 판매권을 따 거부로 우뚝 섰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심성이 온후한 그는 아침이면 늘 주변을 청소할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었고 주변의 평이 좋았던 인사였다.   이은주의 아버지는 프로당구선수 출신으로 흥보당에서 일을 돕다가 후일 당구장을 차려 운영했고 이은주가 영화배우 등으로 성공하면서 고향을 떠났단다.   다른 지역 같으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안내판이라도 제작했을 법도 한데 고향 군산에서의 대접은 소홀한 수준을 넘어선 홀대에 가까운 상황이다.   군산이 낳은 최고의 여배우 이은주(1980년 12월22일생)의 삶을 살펴보자.   그녀는 이상열과 최순향씨의 1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고, 다섯 살 때부터 여고 때까지 피아노를 배웠으며 피아니스트가 원래 꿈이었다.   그녀의 인생이 바뀐 것은 군산영광여고 1학년 재학 중이던 1996년.   어머니와 교복을 사러 갔는데 매장 주인이 교복모델대회(선경 스마트학생복 모델선발대회) 원서를 주며 나가볼 것을 권했다.   이은주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그녀의 어머니가 몰래 원서에 사진을 붙여 보낸 것이 예선을 통과했다.   어머니가 가져온 잡지에서 예선 통과자 명단을 확인한 후 이 대회에 초대 가수로 룰라, 터보, 신성우가 출연한다는 내용을 보고 이들을 볼 심산으로 본선에 참가했다.   그녀는 평범한 외모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최종심사에서 노래를 부르며 막춤을 추는 당돌하고 발랄한 모습을 보여 심사위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은상까지 받았다. 당시 대상은 스타급 연예인 반열에 오른 송혜교였다.   그녀는 같은 해 말 스마트 학생복 CF에 출연했고 이후 KBS 청소년 드라마 '스타트'에 출연제의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듬해 SBS 납량특집드라마 '어느 날 갑자기' 와 같은 방송 월화드라마 '백야 3.98'에 출연했다.   이은주의 첫 영화는 박종원 감독의 송어(1998년)였고 이후 연기에 강한 매력을 느껴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하고 1999년 단국대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한다.   SBS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인기를 끌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특히 홍장수 감독의 '오! 수정'에 정보석(재훈 역)의 상대역인 케이블채널 구성작가 양수정 역으로 출연했다.   이 작품은 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고 같은 해 제53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에도 초청됐다.   이 작품은 2000년 5월 개봉됐으며 이은주는 이 작품으로 다음해 열린 제38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 여우상을 수상했다. 또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이병헌(서인우 역)의 대학시절 첫 사랑 인태희 역을 연기했다.   2002년 차태현, 손예진과 같이 영화 '연애소설'에 출연했다. 세 사람 사이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그녀는 솔직하고 활달한 성격의 김경희 역을 맡았고 서울 관객 59만명을 기록했다. 이 작품으로 제 23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하늘정원, 안녕! 유에프오, 태극기 휘날리며 등에 출연해 스타반열에 오른 상황이었다.   MBC 월화드라마 '불새'에 이서진(장세훈 역)의 상대역인 이지은 역으로 출연, 최고 3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누렸다.   '주홍글씨'출연이후 마음고생을 했던 그녀는 2005년 2월 단국대를 졸업한 뒤 4일 후 자살,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사망 직후부터 언론을 통해 수많은 추측성 기사들이 쏟아졌으나 검경은 유족의 진술과 유서 등을 토대로 우울증으로 인한 단순 자살로 결론지었다. 그녀는 생을 마감했지만 그 후 지인들과 영화팬들이 중심이 돼 매년 추모행사를 갖기도 했다.   화장 후 유골은 경기도 소재 자유로 청아공원 내 기독교관에 안치되어있다.   영화의 도시 군산이 8월의 크리스마스 등과 같은 작품들로 널리 알려졌지만 고 이은주와 같은 대스타의 작품 방영하는 프로그램이라도 만들면 어떨까. 이제로도 이은주를 기리는 푯말이라도 그녀와 관련된 공간에 설치하는 것도 지역의 문화예술역사를 계승하는 것이라는 여론이다.   고 영화배우 이은주씨 외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오늘날 세대로부터 잊혀 진 인물이 있다. 독립운동가요 제헌의원이었던 윤석구 선생이다.   윤석구는 누구인가…제헌의원․독립운동가 ‘맹활약’   윤석구(1892~1950년 9월)는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다. 영국 선교사가 세운 한영학교를 졸업, 교사로 재직해오다 1913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그는 황포군관학교2기로 졸업한 뒤 백범 김구선생의 명령에 의해 임시정부의 연통제 조직인 임시정부 삼수지국에 임명된다.   삼수지역운 이미 독립협회의 밀파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삼수군(우리나라와 만주 경계지역)으로 내려와 활동하는 동안 강일기와 박기춘은 물론 주민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자주정신을 배양케 해 민족항쟁의 정신적 토대를 이룬 곳이다.   이후 윤석구는 1922년 사행 임시정부 국내 자금책에 임명돼 국내로 들어와 군산 멜볼딘학교(오늘날의 영광중․여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로 계속해서 군자금을 보냈다.   그는 1940년대 중반 김구 선생으로부터 임시정부 귀국 준비위원으로 임명됐고 독립운동을 펼쳐왔던 자신의 몸을 숨기기 위해 군산에서 일종의 소화제인 '영신환'을 제작하는 한약상을 운영하며 해방을 맞이했다.   백범으로부터 그는 한국독립당(당수 김구) 중앙집행위원과 건국준비위원회 군산지부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군산지부장, 비상국민회 전북대표의원으로 활동으로 활동했다.   임시정부 입법의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1948년 백범의 명에 의해 무소속으로 군산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 당선됐다. 당시 백범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던 그는 1948년 8월 이승만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김구가 추천한 초대 체신부장관(1948년 8월~ 1949년 6월)에 역임돼 양 거두 사이의 교량역할을 했다.   그가 체신부장관에 오르자 전북 출신 인사들이 대거 발탁되거나 주요보직자로 부상하는 계기도 됐다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서천으로 피신, 자녀들을 지금의 화양면 완포리(고향집)에 남겨두고 인민군이 군산에 도착할 때까지 군산과 대전 등지를 돌며 반공강연을 펼쳤다. 인민군이 군산에 도착하자 그는 서천에서 급히 군산으로 건너와 부산으로 향하던 배를 기다리던 중 한 밀고자에 의해 인민군에 체포, 전주형무소에 이감된다.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자신의 신분이 발각되지 않도록 인민군의 모진 고문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으나 대전 전투에서 패한 뒤 포로가 된 미 육군 딘 소장에 의해 그의 신분이 밝혀졌다. 그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다시 후퇴하게 된 인민군에 의해 총살됐다.    윤석구 선생에 대한 군산시민의 기억은 매우 이례적일 만큼 소수에 그쳤다. 그의 독립정신과 교육자로서, 정치인으로서 역할을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되도록 복권하는 문제가 우리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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