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신문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문화

\'구시장\'… 선조들의 상권 수호의 몸부림 현장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4-08-29 11:23:34 2014.08.29 11:23:34 링크 인쇄 공유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구시장로(전북약국, 수연궁, 옛 유성예식장, 대창철물 등)(중) 개항 후 탄생한 '5일장의 군산장'…  상설시장 생기면서 쇠퇴의 길   장재동에서 장미동까지 옛 중심도로 중 하나가 구시장로다. 구시장로는 일제강점기 때 월명동 및 영화동 등 중심지역과 교통 등을 연결하는 핵심도로 중 하나였다. 이른바 원도심의 대동맥 역할을 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구시장로는 싸전길과 약전길 등 자연스런 시장통을 흡수한 도로였고 이 도로를 따라 공설시장(신금길)과 신영시장(동신영길), 양키시장, 역전종합시장(대명3길) 등을 품고 있는 옛 유통중심지다.   또 옛 역전 주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장이 섰던 새벽시장. 일명 번개시장도 중앙로와 구시장로, 대명1․2길 등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면서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   ◇ 5일장 군산장의 유래   군산의 일반 5일장들이 조선시대 때 또는 그 이전부터 장을 열었던 오랜 역사의 장(場)인데 반해서 군산장은 개항 후 성립된 시장이다.   군산장의 시작은 먼저 군산이 개항 후 급격한 인구증가와 함께 당시 군산의 인구가 중앙로와 둔율동, 신흥동, 영화동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 장이 섰던 경장동이 거리가 멀어 가까운 곳에 장이 있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된데 따른 것이다.   여기에다 결정적인 원인은 교통수단의 대변화 때문이다. 1912년 군산에 철도가 개통된 후 기차가 정차하는 철도역 주변의 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현재의 신영시장 자리 인근과 군산역 앞 광장에 5일장이 서게 된 것이다.   # 경장시장 소멸… 5일장의 군산장 탄생 미원동의 새장터 vs 구시장(신영동시장) 구분 이 장을 사람들은 '군산장'이라고 불렀는데 군산장은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5일장이었으며 우(牛)시장이 서는 매우 큰 시장이었다. 이 장이 생긴 후 경장장이 장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된 것이다.   일제는 상권 변화에 따라 '상설시장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상권 장악을 위해 1918년 장재동(현 대명동)에 재래시장을 개설했다.  그러나 식민지하의 한국인들은 5일장에 익숙한 나머지 군산장만 이용하고 장재동의 시장을 이용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인들은 장재동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군산역 앞의 군산장을 단속하자 현재의 미원동 구 미원파출소 인근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지속적으로 5일장을 유지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 시장이 지금까지 유지되는'구시장'이라는 명칭의 근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구시장로’의 기원이기도 하다.    # 구시장의 탄생… 신영시장의 다른 이름   흔히 신영시장이라 일컫는 구시장의 명칭 유래는 이렇다.   군산장이 미원동으로 옮겨진 후 사람들이 미원동의 군산장을 '새장터'라고 부르고 신영(동)시장 자리는 옛 시장이 있었던 자리라 하여 '구시장'이라 불렀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지만 미원동 신시장은 가축장이 서기는 하였으나 옛 시장만큼 활성화가 안되는 상태로 유지되었는데 그나마 장이 유지됐던 이유는 새장터 인근에 흥남동 도축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29년 그 전부터 활성화가 안 되던 장재동의 조선인 시장 부근에 자리 잡고 있던 조선인 노점상들이 단합, 상가를 열고 주변에 가축시장을 두어 매일 장을 열자 오일장인 군산장은 자연스럽게 소멸된 것이다.   ◇ 상설시장의 등장… 일제강점기 상권 장악용 출발   5일장 쇠퇴의 직접적인 계기는 개항 후 상설시장이 열리면서 비롯됐다.  군산의 경우 개항이 된 후에도 지경장과 임피장, 옥구장, 군산장 등은 계속 열었으나 5일장은 조선인들이 주로 이용했고, 상설시장은 일본인들이 이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체적인 분위기가 상설 시장을 이용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위에서의 구시장은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구시장의 유래와 같은 상설시장적인 뜻을 담고 있어 5일장과 다소 다른 의미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구시장의 의미가 뭐라 지칭했든 신영동에 위치한 시장의 다른 의미였고 이 의미로 구시장의 이름이 연유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오늘날의 구시장' 상설 시장적 의미   군산에서 처음 만들어진 상설시장은 1908년 구 경찰서 앞 서울분식 골목에 개설된 식료품시장이었다.   이 시장의 주인은 일본인이었으며 32명의 중개인을 두었다. 여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중국인 등으로 구성되어 각국 거류지회에 음식물을 제공하는 것이 주된 영업이었다.   이후 1918년에는 대명동 감독 판매단지에 조선인 시장을 개설했으나 활성화되지 못했고 1919년 군산부 상품 진열소가 개설됐다. 이후 1929년 대명동 주변 조선인 노점상들이 단합, 신영동에 상가시장을 여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신영시장(일명 구시장)이다.   당시 신영시장은 목조건물 2동과 점포 4칸의 규모로 주변에 가축시장을 두어 같이 사용했다.   이후 신영시장은 군산 최고의 시장으로 성장했으나 당시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돼 노천에 천막시장으로 운영되다가 1962년 개축됐다. 현재와 같은 시장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69년 슬래브 건물이 완공된 후다.   한편 현 수협 죽성지점 자리에 있었던 군산청과물 시장은 일제강점기에는 부영시장이라 불렀고 본래 구경찰서 앞에 자리하고 있던 식료품시장이 이전해 만들어졌다. 이 시장은 최근까지 청과물 시장이 영업 중이었으나 다른 곳으로 이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해방 후 시장들   해방 후 만들어진 재래시장을 보면 한국 전행 후 피난 온 평안도 사람들이 본래 적은 규모의 시장이 있던 자리에 집단 이주, 미군들에게 얻어낸 군복을 주로 팔며 일구어낸 평화시장(양키시장)이 있었다.   또 일제강점기 유곽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의 집단 수용소 역할을 하며 시장으로 모습을 바꾼 명산동시장(유곽시장) 등이 있었다.   또 대명동의 감독거리는 본래 완주와 고산 등지에서 생산되는 감을 들여다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파는 전문 감시장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유흥업소가 한두 곳씩 자리잡기 시작하더니 1970년도 초에 어느 정도 모습을 갖췄고 1980년대 급격히 번창, 이곳의 명칭인 '감둑�'이 속칭 윤락가를 의미하는'감뚝'이라는 명칭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들 주변에서 2000년대 들어 두 차례의 화재로 집단 참사가 일어나면서 사실상 옛 흔적은 사라졌다. 지금은 잔영을 유지한 채 초기의 유흥가와 같은 술집으로 변해 있다. # 평화시장(양키시장)의 유래   한국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엄청난 피난민들이 군산 미군비행장에서 유통과정 없이 흘러나온 다양한 군수품을 사고팔면서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한국군 부대가 옛 공설운동장과 중앙초등학교 자리에서 주둔하고 있어 다른 지역보다 더욱 활기 넘쳤고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단다. 이곳 주변에서 옷 수선을 하거나 세탁하는 사람들도 들면서 전문상가처럼 입지를 굳히기도 했다. 이 시기는 군산 남성 청․장년층이라면 군복 같은 바지를 입는 것이 당시의 한 트렌드였다.    지금은 30여개의 상점들이 있지만 호시절에는 100여개의 상점들이 즐비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길게는 50년 이상 짧게는 30년 동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키시장 공영주차장에서 작은 골목에 들어서면 구역전종합시장과도 연결된다.

※ 군산신문사의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문자가 잘 보이지 않을 경우 여기 를 클릭해주세요.

카피라이터

LOGIN
ID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