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선 개통… 수륙(水陸) 수탈체제의 완성? 철도도시의 꿈…'백년하청인가'VS'현재진행형' 군산은 개항이후 기차역과 비행장을 지닌 전국에서 얼마 안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특히 군산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했던 것은 군산역의 탄생 때문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개항이후 지금의 월명동과 영화동 등이 중심이었던 도시가 팽창하게 된 것은 군산역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군산의 SOC위상은 다른 도시를 능가할 정도로 대단했단다. 군산항 개항(1899년), 전군가도(후 번영로)의 개설(1908년)과 군산선의 개통(1912년)으로 일본인들은 충남과 전북의 모든 길은 군산으로 통한다고 자랑할 정도로 육상과 해상의 물류중심지였다. 이런 모든 SOC 건설이 식민지 수탈을 위한 흉계, 다름 아니었으니…. 당시 철도의 위상은 대단했다. 항구가 해외로 가는 길목이었다면, 철도의 개통은 다른 내륙 도시로 연결되는 장거리 육상 여행시대를 연 대단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100년도 채 안돼 옛 군산역은 사라지고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사라진 군산역 자리는 새로운 '구암3.1로'가 연결돼 지금은 거의 옛 모습을 찾기조차 힘들 정도로 상전벽해가 됐다. 옛 군산역은 내적으로 구시장로와 중앙로, 미원로 등과 긴밀한 연계되는 중심교통망이기도 했다. 기존 구암 3.1로는 구암동에서 중동로타리까지였는데 2010년 12월11일 도로망 확보를 위해 역사(驛舍)가 철거되면서 이 도로가 연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3.1도로는 중앙로 3가(중앙로)에서 구암동까지 3.773㎞를 연결하는 도로로 하루 수만대가 오갈 정도로 대로로 변했었다. ◇ 어떻게 군산에 철도가 들어왔나 최초의 호남선 철도공사 계획은 1906년 충남 강경으로부터 목선을 타고 군산에 나타난 시라이시라는 공학박사와 그의 조수들에 의해 비롯됐다. 이들 측량반은 일본 제국주의를 지탕하던 미쓰비시에서 계획 중인 한반도의 서해안을 가로지르는 철도 부설 공사권을 선점하기 위한 준비 작업차원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것이었다. 이 조사반의 본격적인 철도부지 조사사업은 1907년 3월 시작됐는데 이 측량반은 표면적으로 대한제국 농상공부의 위촉을 받아 측량을 한다고 둘러댔다. 이 측량반은 2개조로 나뉘어 한 개조는 조치원에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고, 다른 한조는 목포에서부터 북쪽으로 측량을 해왔다. 조사기간만 6개월이 소요됐다. 하지만 철로노선을 놓고 예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군산과 전주의 입장이 달라 노선변경사태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군산은 철도공사에 대찬성인 반면 전주는 절대반대로 맞섰다. 양측은 한치 양보 없이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 이유는 전주는 지역유림들이 들고 일어나 철도가 들어서면 전주의 지맥(地脈)이 끊기고 지반이 울려 명당의 기운이 다한다는 풍수지리를 내세워 반대했다. 반면 군산지역의 일본 상공인과 대지주들은 철도가 지나야 토지수탈과 쌀의 원활한 운송이 가능해져 지역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찬성했다. 양 지역의 상반된 의견과 철도부설권을 놓고 알력이 일어나면서 총독부가 직접 건설하기로 결정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 1907년에서 1910년까지 의병항쟁이 가열 차게 일어나면서 한일합방 후로 지연됐다. 군산과 전주의 철도 노선을 둘러싼 다툼은 2라운드를 맞게 되는데 양 도시에 각각 수천정보의 거대농장을 두고 있었던 미쓰비시와 오오꾸라그룹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또 한 번 격화됐다 미쓰비시의 전주 매암리선과 오오꾸라의 군산 지경리선이 격돌하지 총독부는 고육지책으로 전주와 군산의 중간지인 익산의 목천포선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전북의 변방이었던 작은 마을 솜리(향후 이리)가 철도 교통중심지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 군산선 개통… 철도 시대 화려한 개막 군산과 전주 철도 노선 싸움은 익산의 어부지리로 끝났다. 이로써 당시 이리는 새로운 지역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여전히 군산의 물류거점지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1912년 호남선의 지선인 군산선을 개통했다. 총길이는 23.1km. 여기에는 개정역, 대야역, 임피역, 오산역 등 추억의 간이역이 있었다. 일제는 군산선의 개통으로 수륙수탈체제를 갖춰 이익의 극대화를 도모할 있게 됐다. 첫 번째 이익은 물류유통의 원활화로 군산의 상권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강경 상권을 몰락시킬 수 있었고, 두 번째로는 내륙의 농산물을 쉽게 군산에 운송시키고 일본 자본의 내륙진출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셋째로는 군산으로의 철로 개통으로 항만과 철도를 연결, 대륙침략 전진기지로서 군수 및 병력 수송 등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는 극대화했다. # 군산역의 위상은 1912년 3월6일 호남선의 지선으로 군산선이 개통될 때 세워진 군산역은 2층 규모의 일본식 목조건물 모습을 갖춘 지역 내 최고의 시설 중 하나였다. 역의 특징은 사진 속의 군산역이 북한의 평양역과 같은 설계로 만들어진 판박이였다는 점이다. 또한 역 앞에는 당시 시내에 몇 대 설치되지 않았던 공중전화기가 있었는데 나무로 만든 군용초소 모양의 공중전화 부스 안에는 구형 수동식 전화기가 놓여 있었단다. 전화요금은 한 통화에 2전이었는데 요즘과는 달리 통화시간은 무제한이었다. 역전에 기차가 도찰할 때면 기차에 내리는 손님을 맞기 위해서 인력거와 택시가 역전광장에 모여들었는데 여기에 주변 여관의 호객꾼들이 대나무로 만들어 한지를 바른 일본식 등(燈)에 자신들의 여관 이름 적어들고 나와 손님 유치전을 벌이는 소동까지 벌였을 정도다. 이 군산역사는 한국전쟁 때(1950년 7월1일) 폭격으로 전소됐고, 얼마 전 까지 있었던 역의 소화물 창고자리가 최초의 군산역사 자리였다고 한다. 그 당시 군산선의 종착역은 얼마 전 까지 존재했던 군산역 자리가 아닌 1944년 폐지된 한전 뒤편의 내항에 자리했던 군산항역이었다. 1931년 역무원이 배치된 간이역이었던 군산항역은 개찰구만 있는 적은 규모였는데 군산 내항의 여객선 도착 시간에 맞춰 열차를 운행했다. 장항에서 도선을 타고 온 사람들이 간이역 시설을 갖춘 이곳에서 승차한 뒤 옛 군산역을 지나 대륙으로 갔단다. 현재 군산항만역사는 없어졌지만 이 때 놓여진 6개의 내항 철길은 진포해양테마공원과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사이의 벌판에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채로 남아 있다. 옛 조선은행 쪽의 철로 3개는 1912년 일본인들이 충청과 호남지방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개설한 것이며, 진포해양테마공원 옆 쪽 철로 3개는 1933년 축항사업이 되면서 추가적으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 전주~군산 간을 운행하던 열차는 경전철이라고 부르던 크기가 작은 협궤열차였는데, 이 열차가 하루 4회 군산과 전주를 왕복 운행했단다. 당시 열차 요금은 1원40전이었으며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이었다. 한편 우리가 알고 있는 옛 군산역은 1960년 10월5일 신축 준공됐다. 이 역은 2007년 12월 장항선의 종착역이 되어 내흥동 현 군산역(신역(新驛))으로 이전했고, 군산화물역으로 개칭됐다가 2008년 7월1일 화물열차까지 운행이 중지, 사실상 역으로의 기능은 상실됐다. 옛 군산역은 2010년 11월27일 폐쇄됐고, 그해 12월11일 구암 3.1로가 확장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페이퍼코리아선이란 옛 군산역(군산화물역)에서 페이퍼코리아(구 세풍제지) 공장까지를 잇는 약 2km의 전용선으로 정식 명칭은 '페이퍼선'이다. 일명 세풍제지(고려제지)선이라 불리기도 한다. 경암동 주택가를 지나가는 부분이 선로와 주변 주택이 대단히 가까이 붙어 있어 영화와 화보 촬영지로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곳을 찾는 마니아들까지 등장, 지금도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선은 2008년 6월까지 열차가 운행됐으며 폐지된 후에도 관광자원으로 각광을 받아 선로는 존치되어 있다. 한편 옥구상평선 또는 비행장선은 폐선단계에 있지만 철도의 형태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