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장항선과 연결…'本線 승격' 개통 후 최고의 사건 '월남 이상재 선생'운구 千里 이동 지금은 상상이 안 되지만 과거 군산선과 장항선이 연결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기는 따로따로 운행돼 별도의 철도 노선으로 존재했다. 수년 전 군산과 장항의 철도 연결은 익산~군산~장항~대천~ 광천~홍성~용산 등으로 이어지는 확장된 장항선으로 변했지만 과거와 판이하게 달랐다. 어찌됐던 철도개통 100년 역사 중 군산선의 최대사건은 뭘까. 1920년 후반에 있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운구가 군산역에 도착했을 때일 것이다. 1927년 3월 한말 정치가요, 민족운동가였던 월남이 서거하자 서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사실상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향리(鄕里)까지 오는 것이 묘연했다. 당시로선 군산까지 오는 길이 멀어 직접 버스나 다른 자동차로 이용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타계했던 월남 운구를 고향 선영까지 이동하는 방안으로 철도를 이용하는 방안이 제기됐다. 이에 그의 운구는 서울에서 호남선을 따라 이동했다가 익산(옛 이리)역에서 군산선으로 바꿔 타고 그의 향리인 충남 서천군 한산면까지 천리가 넘게 이동했다. 군산에서 내려 도선장에서 장항까지 도선을 이용, 향리로 운구를 옮긴 것. 군산역과 그 주변을 얘기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공간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옛 군산역 인근에 있었던 무료경로식당과 팔마고가교다. 역전 무료경로식당은 IMF전후에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점심을 먹지 못한 노인들과 실직자들이 급증해 파생된 사회적 산물이었다. 시가 지원하고 자원봉사자들이 나서 이들 대상자들에게 무료 급식하는 공간이었지만 이곳은 처음에는 허름한 시설에서 출발, 최근이 되어서야 새로 단장했다. 1996년 7월 대명동 당시 군산역 앞에 이 식당이 문을 열어 굶고 있는 불우노인이나 실직자 등에게 무료점심봉사라는 지평을 연 것이다. 이곳을 찾은 노인 등은 하루 평균 200여명에 달하고 주요 봉사자 및 봉사단체는 지역 내 종교단체를 비롯한 대기업 봉사단체, 자원봉사자, 법원 및 검찰 산하단체, 학생, 공무원 등이다. 중앙로로 군산역과 옛 도심, 시외 및 고속버스 정류장, 번영로 등을 가기 위해 꼭 지나야 하는 곳이 '팔마고가교'다. 이곳은 군산역 진입선과 도로가 마주하는 바람에 사고우려와 저지대라는 특성 때문에 불가피하게 고가교를 만들었다. 그 전에는 우회하는 작은 도로가 있었으나 1976년 개설돼 중앙로의 핵심적인 이동로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2008년 9월, 32년 만에 철거됐다. 철거 후 폭 25m 왕복4차선의 평면도로로 변하면서 이곳이 새로운 중심도로로 변했고 주변은 말끔히 단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군산역이 현재의 군산역으로 2008년 1월1일 이전, 군산화물역으로 바뀌었다가 그 해 7월1일 폐역 됐던 상황과 비슷한 시기에 팔마고가교도 역사 속으로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 고가교는 시행청인 군산시와 업무문제로 시공사와 마찰이 돼 다툼을 벌이는 촌극도 있었단다. 이 때문에 당시 시 관계자들이 사법당국 등을 오가면서 고초를 겪었지만 최종 승소해 마무리된 것이다. 팔마고가교는 왕복 2차선(폭 8.5m)에 총 길이 240m로 결빙이 되는 겨울이면 시청소속 수로원과 직원 등이 늦은 밤이나 새벽이면 제설작업을 하느라 큰 곤욕을 치렀다. 군산신문사 역시 벚꽃아가씨 선발대회를 하기 위해 초청된 군악대 등의 행사차량과 도보 행렬이 넘기 어려운 점을 감안, 차량으로 이동해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당시 제설업무를 했던 한 시청 직원은 "눈이 오면 철야를 하기 일쑤였다. 특히 빙판길이 다 된 이곳을 통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염화칼슘 등 각종 제설제를 뿌리면서 뜬 눈으로 차가운 겨울밤을 지새워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회상했다. 이 시기에는 차량들이 거북이걸음을 하는 경우 많았고 이곳을 오르려다 미끄러져 차량들 간 충돌 등 교통사고까지 일어나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팔마재의 유래 옛날에는 군산사범학교(지금은 군산고) 뒷산이 팔마산이고, 사정동에서 한일아파트 쪽 철로건널목 주변이 일명 팔마재다. 팔마재는 철로를 따라 지금의 군산고 쪽에 있는 팔마산으로 도는 곳을 '바람매'라고 했다. 물론 바람매 라는 말의 유래는 바람이 돌면서 많이 분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군산이 크게 변해 건물이 우뚝 서 있는 군산관광호텔쪽이나 최근에 사라진 팔마고가교가 있었지만 그 당시는 팔마재의 건널목을 거쳐야 옛 군산역이나 지금의 구시장 방향으로 갈수가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이곳 팔마재는 아침이면 회현, 대야, 옥산, 상평 등에서 마차와 소달구지 또는 리어카로 쌀을 실고 와서 사고파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상인들은 이곳에서 가져온 쌀의 품질을 알아보기 위해 '삭대'라는 대나무나 쇠로 만든 도구로 쌀가마니를 찔러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곳에는 쌀가게들이 많아 영일상회, 유성상회, 대풍상회 등이 많았단다. 물론 지금은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장년층들의 전설과 같은 얘기로만 전해지고 있다. 이런 연유로 팔마재라 하면 군산의 관문이요, 또한 쌀시장이 형성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군산관광호텔이나 전북은행 경장지점, 군산농협 팔마지점 등이 그 중심지이다. 물론 과거에는 분수대가 있었고 원형로타리로 이뤄져 자동차들이 중동이나 역전 및 경장동 쪽으로 돌면서 주행했고 저녁이면 분수대에서 오색 물결이 치솟으면 분수의 모양이 아름다워 군산의 명물 역할을 톡톡히 했다.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 사회운동․ 민족교육․ 언론창달 등 앞장선 민족의 선각자 이상재 선생은 1850년 10월 충남 서천군 한산에서 출생, 개화파 박정양의 문하생으로 시작해 사회운동과 민족교육, 언론창달 등에 앞장선 민족의 선각자였다. 1881년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김옥균 등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 윤치호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의 신흥문물과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개화운동에 헌신할 것으로 결심한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했다가 박정양이 1887년 6월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 2등 서기관으로 도미한다. 그 다음해 10월 귀국했고 전환국 위원,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관, 학부아문 참의 겸 학무국장 등을 거친다. 관가에서 많은 겪으면서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해 만민공동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려 구금되지만 10일 만에 석방된다. 그해 12월 정부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초야에 묻혀있었지만 수구파들의 공격으로 투옥된다. 옥에서 나온 월남은 1904년 2월 서양선교사 게일이 담임목사로 있던 서울 연동교회에 옥중 동지들과 함께 집단 입교, 세례를 받는다. 이후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에 가입한 뒤 민중계몽운동에 힘썼고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기독교청년회 등의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민중계몽운동에 전념하는 등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1운동 때 배후에서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부터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전국연합회장으로서 제2독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을 주관하면서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역할을 했다. 1927년 1월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이 연합,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한 신간회의 창립회장으로 추대됐지만 두 달 만인 3월29일 78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그가 떠나자 YMCA를 비롯한 243개 사회단체들이 주도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서울서만 1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