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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꽁당보리축제에는 꽁보리밥이 있다

보릿고개를 넘어본 사람은 안다. 해마다 보리타작을 하고난 밭, 그 가운데 즈음에 수북이 쌓인 검불더미에 불을 붙이면 그 타들어가는 소리가 우리네 빈속이 쓰릴 정도로 몸속까지 공명되었던 기억을.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7-04-05 11:17:00 2017.04.05 11:17:00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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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릿고개를 넘어본 사람은 안다. 해마다 보리타작을 하고난 밭, 그 가운데 즈음에 수북이 쌓인 검불더미에 불을 붙이면 그 타들어가는 소리가 우리네 빈속이 쓰릴 정도로 몸속까지 공명되었던 기억을. 그때가 되면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이삭줍기 한 보리를 잔불에 던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 속에 들어간 보리는 이내 검게 그을리면서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펑’하고 이리저리 튀어 오르곤 했고 모인 사람들의 입 주위는 검댕이로 변했다. 그것은 일 년의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배가 고팠다. 쌀이 우리의 주식이 된 때는 고작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보리는 누천년 동안 우리 민족의 안방 먹거리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와 보리의 인연은 마치 피에서 피로, 숨결과 숨결로 이어진 것과 같고 우리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한 보릿고개를 넘어온 사람들은 거의 20여 년간 보리를 외면하는 ‘이유 있는’ 단절의 시간이 있었다. 그 이유는 가난과 보리밥이 동의어인 시대의 중심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 세대에게 보리는 버리고 싶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그 가난을 물리도록 먹었으니. 그때 그 시절의 꽁보리밥 한 그릇… 꽁보리밥, 그 당시 국민학교 수업을 파하고 집에 돌아와 간식거리를 찾을라치면 항상 부엌에 대롱대롱 둥그런 대나무 채반에 놓여있었던 그 보리밥. 이내 장독대에서 급히 퍼온 된장, 고추장에다 마당 언저리 채전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뜯어다가 손으로 대충 잘게 잘라 보리밥과 비벼먹어도 남부럽지 않았던 추억이 우리에겐 있었다. 그런 추억마저 과거의 어두운 유산 정도로 여기게 된 계기는 아마도 쌀 생산이 늘어나면서 혼반의 금줄이 풀리면서 일 것이다. 한동안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보리가 2000년대 중반 이후 웰빙 바람에 힘입어 다시금 우리 밥상에 돌아왔다. “보리, 말만 들어도 징글징글혀” 하던 우리의 엄마들, 누이들이 “인절미가 된다는, 그 보리 주세요” 하며 보리시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은 군산농업인들이 문을 열었던 우리나라 찰보리 시장 덕분이었다. 군산농업인들이 이렇듯 선구자 노릇을 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농산물 개방에 맞서야 하는 그들에게 생존의 문제 때문이었다. 군산농업인이 찰보리가 생존의 돌파구인 것을 먼저 알아봤고 이를 제대로 알릴 방법으로 직거래와 보리축제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농업인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축제를 띄운 것이었으니 자생 농업축제로서 결코 가볍지 않음이 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농사일 시작과 중간, 끝에 마을 추렴을 통해서 마을의 화합과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풍물을 치고 호미씻이하던 그 마을 연례행사를 군산보리의 상징성을 자원으로 한 농업축제로 탈바꿈시켜 농경문화에 익숙한 우리의 감성을 적절하게 자극한 것이다. 그것도 그때 그 시절 보릿고개 한가운데 있던 오월에…. 우리네 삶과 함께한 보리이야기 그 옛날 마한의 사람들이, 백강전투에 지친 병사들이, 조운선을 타기 전 선원들이 그늘진 초막 자락에 자리 잡고 먹었을 법한 군산의 꽁보리밥이 보릿고개가 절정인 오월에 그토록 먹고 싶은 까닭을 우리의 몸이 먼저 아는 것은 그간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미 답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여 최치원의 설화가 정겨운 내초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머물던 선유도에서, 최무선 장군의 진포대첩이 있었던 금강하구에서 그들의 허기를 채웠던 군산보리를 군산의 역사와 동일 시 하는 것이 얼토당토않은 주장만은 아닐진저. 우리나라 어디든 쌀, 보리를 빼면 무슨 이야기가 얼마나 있으랴마는 특히 군산은 보리의 역사요, 쌀의 역사가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군산은 조창이 발달된 항이었고 그 역사는 천년을 넘어선다. 그 역사의 땅에서 보리를 매개로 축제가 태어난 것은 분명 필연일 터. 불과 100여 년 전에는 개펄이었고 포구였으며 바다였던 곳(미성동)에서 군산꽁당보리축제가 열린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간척지가 늘어나면서 군사지역의 보리농사는 그만큼 늘어났다. 군산은 전국적으로 보리 재배의 최적지이고 생산성이 뛰어난 지역 중에 한 곳이 되었다. 이를 농업인들은 다른 말로 “보리가 쌀만큼 난다”, “보리가 효자다”라고 말한다. 이미 군산보리는 정평이 나있다. 해마다 오월이면 군산에는 그 역사의 현장에서 징, 꽹과리, 장구의 소리를 시작으로 신명이 지핀다. 세월이 흘러도 지피는 신명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늘 농심(農心)에 맞닿아 있고 한 해 농사의 본격적인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신명난 마당에서 도시와 농촌이 하나 되는 것은 오래된 기억을 오늘로 불러내어 한판 흥겨운 놀이로 풀어낸다. 그것이 농업 축제의 본색이거니와 군산꽁당보리축제가 보이고 싶은 그 자체일 것이다. “오라! 봄의 보리밭, 싱그러운 봄의 추억여행으로!” 보리 이삭이 사람 무릎 위로 올라올 때쯤 군산꽁당보리축제는 어김없이 열린다. 오는 5월 4일부터 7일까지 국제문화마을 앞 너른 들판의 보리밭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댈 것이다. 이 날의 싱그런 봄 추억여행은 누군가에게는 옛 기억에 대한 추억을 선물하고 누군가에게는 지금 이 시간에 대한 추억을 남겨줄 것이다. 새파란 청보리와 사람들의 웃음, 이야기로 가득 차있는 그 축제가 올 해 역시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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