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축구꿈나무의 등용문인 2011 금석배 전국 초∙고등학생 축구대회 지난 18일부터 오는 29일까지 126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12일간의 열전에 돌입했다. 박지성, 조재진 등과 같은 세계적인 스타를 배출했던 금석배 전국학생축구대회의 화려한 위상 뒤에는 고 채금석 선생이라는 위대한 축구선수가 있었다. 1995년 12월 26일 향년 91세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오로지 축구공과 함께 인생을 마감한 한국의 대표적인 축구국가대표 선수이자 축구 지도자로서 한국 축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채금석 선생은 그야말로 진정한 축구인으로 불렸다. 전북 축구인들은 그의 축구사랑정신을 기리기 위해 금석배 축구대회를 1992년에 탄생시켰다. 당시 양희철 군산시 체육회 부회장은 채금석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강현욱 국회의원에 축구대회 창립을 제안했고 이어 이진삼 체육부장관의 최종 승인하에 금석배 축구의 서막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 암흑기인 1904년 4월9일 구암동 260-1에서 태어난 채금석 선생은 주력이 좋아 ‘오토바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채금석 선생이 축구공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02년 미국 남 장로교에서 세운 군산영명학교 축구부에 입단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 후 영명학교 시절부터 군산구암교회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축구 경기 모습을 보며, 매일 아침 축구를 하기 위해 동네 후배들과 지금의 구암교회 뒷편(현재 화전 사원 주택)을 찾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1930년 경신 중 재학시절 일본대표(와세다 대학)팀과의 경기를 우승으로 이끈 선수로서의 활약상은 당시 전국에 걸쳐 유명한 일화가 될 만큼 기량이 뛰어난 선수로 활약했다. 또한, 1933년 제2회 경·평(서울·평양) 전에 출전, 채금석의 득점으로 승리로 이끈 이후 해방 전(1944년) 까지 한국의 축구 왕 김용식 씨 등과 출전해 명성을 얻었다. 1934년 광주학생사건과 관련, 일본관헌 폭행사건으로 중학교를 중단한 채금석 선생은 이후에도 계속 평화축구단 등 소수의 여러 축구 조직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일에도 앞장섰던 의혈 넘치는 애국청년이었다. 1935년 베를린올림픽 예선전에 한국 대표선수로 출전한 것을 끝으로 국가대표선수 생활을 마치고 낙향한 이후에도 고향 출신으로 이루어진 일명 구암축구단을 구성, 활약하면서 53세까지 전북 일반부 전국체전 전북대표로 출전하리만큼 왕성한 축구사랑정신을 발휘했다. 1985년에는 경신고등학교 측으로부터 마침내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일본순사 폭행사건 후 실로 51년 만에 학업 중단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채금석 선생은 한평생을 선수로서 뿐만 아니라 훌륭한 축구 지도자 및 국가대표선수, 프로축구, 실업, 대학, 초·중·고 등 후진 선수양성에 공헌함으로써 한국축구발전에 크게 기여한 한국 축구계의 거봉이자 거인이었다. 특히 채금석 선생의 후배에 사랑은 남달랐다. 해방과 동시에 고향으로 내려 온 그는 전국 도시대항 및 전국체전 대표선수로 출전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군산공설운동장에서 군산지역 축구 동호인과 중고생들을 지도하는 등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그후 타계할 때까지 구암초 운동장에서 무료로 초등학생을 지도했으며 오직 축구만을 사랑한 위대한 영웅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고 최재모(전 전주대 감독), 정태훈(한양공고 감독), 김승철(은행 지점장) 등 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했으며 그 후에도 유동춘, 유동관, 유동우, 유동기, 유동욱 5형제를 차례로 가르쳤던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 김이주 현 제일고 감독과 현재 프로축구선수, 실업팀 선수 등을 다수 양성하며 한국축구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양희철 군산시 체육 고문은 “채금석 선생은 그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도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며 “명예조차 몰랐던 그 분은 오직 축구사랑으로 후배양성에 힘써왔던 진정한 축구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