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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의 꿈을 향해 뛰고 또 뛴다”

지난 1982년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는 명실상부 국내 제1의 스포츠다. 프로야구는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기점으로 가족과 여성 팬이 급증하면서 유례없는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상황.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2-10-02 09:09:55 2012.10.02 09:09:55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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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82년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는 명실상부 국내 제1의 스포츠다.   프로야구는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을 기점으로 가족과 여성 팬이 급증하면서 유례없는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상황.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관중 600만명을 돌파한 프로야구는 이제 700만명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다.   올해로 출범 31년을 맞은 프로야구는 그동안 리그의 규모와 인기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면면을 들여다봐도 눈에 띄게 성장했다. 프로무대를 노크하는 어린 선수들에게 말 그대로 꿈의 무대.   하지만 프로팀에 입단하기까지는 고난의 연속이며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해마다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인원은 평균 650~700여명. 그러나 구단에서 지명하는 신인선수는 고작 100명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선수들 사이에서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더 좁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럼에도 전국 초중고를 비롯한 대학교에서 오직 야구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9000여명의 선수들은 꿈을 향해 오늘도 땀방울 흘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부상 등 악재를 이겨내고 프로 무대를 도전하는 이가 있다. 호원대 야구부에서 활약하고 있는 고석찬(23․외야수) 선수. 그의 키는 175cm다.   운동선수치고는 작다는 소리를 듣는다. 고교시절에는 오른손을 다쳐 유급까지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비교적 작은 체구와 부상이력은 운동선수로서는 치명타일수 있지만 주위의 냉랭한 시선 속에서도 프로의 꿈을 안고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에게 남은 기회의 시간은 1년. 내년 활약 여부에 따라 프로 입문을 향한 1차 관문인 신인 드래프트에서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   “후회되지 않을 만큼 죽을 각오로 해볼 생각입니다. 그동안 이를 악물고 이겨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꼭 프로무대를 밟을 수 있도록 할 거예요.”   군산이 고향이지만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경북 구미로 이사 한 고 선수는 구미 도산초 6학년 때 처음 방망이를 잡았다.   이후 구미중 야구부에 입학한 그는 창단 이래 처음으로 전국대회 8강 진출에 성공하는 주역으로 활약하다 군산상고 야구부와 인연을 맺고 아버지의 고향이자 자신의 고향인 군산에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체구는 다른 선수보다 작았지만 100m를 11초대에 돌파하는 빠른 발이 매력적이었다.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쌕쌕이 같은 주루 플레이와 수비를 선보이면서 1~2학년 때에도 대타나 대주자 등으로 꾸준히 경기에 나섰고, 타격 재능도 서서히 살아나면서 야구 관계자들에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예상치 못한 역경이 잇따라 찾아왔다.   고3때 프로에 입단하기 위해 하루 4시간 정도만 잠을 자며 훈련에 몰두하던 그에게 오른 손바닥뼈 골절이라는 예상치 못한 부상이 찾아왔던 것. 하루에 수백에서 수천번 무리하게 배트 스윙을 했던 게 컸다. 다시 배트를 잡기 위해서는 수술이 불가피했다. 결국 서울에서 수술을 한 뒤 감독님의 권유로 어렵게 유급결정을 내리고 후배들과 한 해를 더 보내야 했다.   “성적을 내야할 중요할 시기에 부상을 당해 마음의 상처가 컸습니다. 몸과 마음도 지친 상태였지만 주변들의 격려로 힘을 낼 수 있었고 또 1년 늦더라도 그만큼 실력을 키우자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고 선수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또 다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아버지의 살업실패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는 꿈을 접을까 고민했다. 가정을 위해서는 배트가 아니라 어디에서든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만류했다.   “야구선수로서 성공하고자 하는 너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이렇게 아버지는 그의 어깨를 두르려줬다.   이를 악물고 다시 운동장으로 나선 그는 이듬해 군산에 창단된 군장대에 입학해 새롭게 도전에 나섰지만 학교 사정으로 야구부가 1년만에 해체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군산상고 시절 자신을 지도해준 호원대 나창기 감독이 손을 잡아주면서 호원대에 편입할 수 있게 됐고, 현재는 꿈을 향해 전력질주 하고 있다.   나 감독은 “고교시설부터 재능과 잠재력이 뛰어난 선수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호원대로 넘어와 외야수로로 나서는 경기들이 많아지면서 그는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열린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연세대와의 1차전에서 2타점 2루타로 승리를 챙기는데 크게 일조했다. 다음경기인 영남대에서도 2타점과 볼넷 2개로 만점 활약을 펼쳤다. 창단 9년째를 맞은 호원대 야구부에서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고 선수의 롤모델은 현재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 선수인 아오키 노리치카(30․밀워키).   그는 교타자다. 정교함과 안타 생산 능력 그리고 수비와 빠른 발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고 선수가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특히 비슷한 키와 좌타자 등 일맥상통한 면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선망의 대상이 됐다.   고 선수는 “아오키처럼 프로무대에서 최고의 타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프로팀에서 원하는 선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감과 열정만으로 되지 않는 게 냉정한 프로세계라는 것을. 그러기에 실력을 키우기 위한 그의 노력도 멈추지 않겠다는 각오를 내비치고 있었다.   이처럼 고 선수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야구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하는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아들의 꿈을 위해 안팎으로 뛰어다니던 고승호씨. 그는 아들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그의 성공을 바라고 있었다.   고승호씨는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석천이가 어려움 속에서 그 동안 잘해줬다”며 “앞으로도(석천이가) 최선을 다해 자신이 도전한 이 길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프로를 향한 젊은 선수들의 아름다운 도전을 지켜보라. 이들의 도전은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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