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신문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특집

‘군산의 경제인展-근대산업의 거인들’②삼국시대 이전부터 풍부한 쌀의 고장

금강과 서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 ‘쌀 유통의 포구’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9-01-11 13:11:29 2019.01.11 13:11:29 링크 인쇄 공유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역사적으로 4대 문명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문명, 이집트문명, 황하문명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모두 큰 강을 끼고 있다는 점인데, 군산은 금강과 서해를 서로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기에 최고의 식량생산지이자 식량 저장소, 교통로, 무역로 역할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국가의 최고 경제적 요충지였다.


역사적으로 호남지역은 쌀과 곡식이 풍부한 지역으로 기록돼있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 이전 기원전 1세기~AD 3세기에 삼한(마한,진한,변한)은 전라도·충청·경기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小國)으로 구성돼있었는데, 이중 마한은 식량과 곡식이 풍부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금강과 서해를 접한 하늘의 은혜를 받은 군산은 전통적 항구도시이자 최고의 식량생산지였다. 항구도시이자 최대 식량생산지의 이점을 이용해 세곡을 운반하고 저장하는 조운창고인 ‘진성창’을 설치했다. 진성창은 전북 각지에서 거둔 조세와 공물을 쌓아두는 고려 12조창 중 하나로 그 위치가 현재 성산면 창오리로 비정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당시 일본은 유황과 황 등을 고려에 수출하고, 식량과 책, 농기구 등을 수입했는데 그 식량의 대부분이 호남지역에서 생산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유명세로 인해 역사적으로 여러 번 피해를 봤는데, 그 예로 1358년 공민왕(7년)시기에 식량난에 허덕이던 왜구의 침략으로 고려는 큰 피해를 입었고, 고려 정부는 바다에 인접한 창고들을 내륙으로 옮기도록 조치했다.

​또 1380년 우왕(6년)에 진포를 거점으로 내륙으로 침입했을 때 당시 고려는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를 주 무기로 대응해 대승했는데, 이 전투가 유명한 진포대첩이다. 이 당시 해전 기지로 삼은 곳이 바로 고군산도의 선유도였다.


이후 조선 초기 지방 방어 체제가 영진체제일 시절에는 진성창의 맥을 이어받은 군산창과 그곳을 지키는 수군부대인 군산진이 위치했는데, 해마다 군산에는 쌀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와 조운선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을 정도로 북적였다.


시간이 지나 조선 중기 임진왜란(1592년)에도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목삼아 조선을 식민지화 하고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려고한 일본은 군량미와 본국의 식량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호남지역 공격을 지시했을 정도로 호남지역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고, 군산 또한 역사적으로 전북 경제적 관문의 명맥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았기에 국가의 엄격한 관리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쌀은 생활의 필수 품목이자 화폐 그 자체로도 볼 수 있었는데, 조선 이전에는 쌀과 곡식으로 물물교환을 했다. 뿐만 아니라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공납을 쌀로 납부하자는 수미법과 광해군을 거쳐 숙종시기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던 대동법 또한 이를 대변해주는 부분이다. 때문에 고려․조선시대 모두 공통적으로 쌀이 모이는 조운 창고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했고, 근․현대에 이르러 그 명맥을 이은 포구의 주인은 객주들이었다.

해양물류유통의 중심지로서 찬란한 상업문화를 꽃 피웠던 군산은 상업문화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객주정신이 깃들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무렵부터 강과 포구 등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객주들은 숙박시설인 주막과 여각 등을 운영했으며, 군산 객주들은 조선 말,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 빛을 발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예상하고 우리 상권을 지키기 위한 각종 사회경제운동을 펼쳤는데, 객주회사를 중심으로 20세기 초, 많은 객주들이 신민회의 국채보상운동과 교육운동과 3.1 운동 등에 참여해 일본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농업혁명’은 기원전 7,000년 전 인류가 수렵·채집 경제에서 생산․농업 경제 사회로 변화한 문명사의 획기적 사건을 말하는데, 역사적으로 ‘농업혁명’을 중요시 하는 이유가 이러한 혁명이 있었기에 정착생활이 가능했고, 결과적으로 가정과 집단, 국가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이후 만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현대까지 국가가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적 형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러한 농업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 비해 생산력이 늘어나고, 과거에 비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할지언정, 과거에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쌀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이자, 그 자체적 경제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 군산신문사의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문자가 잘 보이지 않을 경우 여기 를 클릭해주세요.

카피라이터

LOGIN
ID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