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바다와 금강, 만경강이라는 두 개의 강과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고장 군산은 오래전부터 농업과 어업이 중요한 생업으로 여겨졌다.
서해의 다양하고 풍부한 수산물과 군산이 물류 교통의 중심지였던 점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장점을 이용해 고군산 어장을 일구어낸 어부들은 호남지역의 풍부한 식량과 더불어 군산의 경제 전반을 먹여 살렸다.
전라북도의 서해안 지역은 금강, 만경강이 만나고, 동진강이 유입되며 넓은 갯벌이 형성돼 수산생물이 서식하기 좋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군산 해안지역에 대한 기록으로는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1817년(순조 17)에 부국강병을 목표를 두고 중앙 행정의 개편을 비롯해 관제·토지·부세 등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하기 위해 저술한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호남 고군산은 어세(漁稅)가 가장 높고, 어홍(漁篊,어전)이 많이 모인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그 당시 해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어종이 군산과 고군산 앞 바다로 몰려들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조기와 청어가 특히 풍년이었다고 전해진다.
1801년부터 1818년까지 당시 유배중이였던 정약용이 자신의 저서에 강조했을 정도로 군산과 고군산도는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고, 흔히 일상적으로 표현하는 “고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라는 표현이 고군산 어장에게 있어서 은유나 과장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풍부한 물고기를 어민들이 잡아오면, 그 물고기는 각 포구의 객주들이 위탁받아 매매를 주선해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행상을 하고 객주와 시장을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가 이루어지도록 중간자 역할을 했던 보부상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 지역의 5일장에 내다 팔았고 이를 통해 군산 경제 전반을 지탱해줬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서양열강과 청․일본과의 조약에 의해 조선은 경제적 수탈을 끊임없이 당했고, 그 수탈 과정에서 객주들 또한 급변하는 변화의 파도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군산 객주들은 민족과 자본이라는 갈림길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는데, 그 중에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가혹한 상황을 개척해 나간 객주인 김홍두가 있었다.
김홍두는 26세에 황실의 재정을 담당했던 내장원에 대항할 정도로 원칙에 충실하고 뚝심이 있던 인물로 물상객주로서 큰 부(富)를 쌓았던 인물이다.
나라가 기울어가던 격변기 시기에 지역 경제·사회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던 김홍두는 1903년 진명의숙과 금호학교 설립에 참여했고, “부국강병의 실현은 교육 발전을 통해 이룩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김홍두는 군산객주상회사에 소속돼 신민회(1907~1911)와 함께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1907년)에도 적극 팔을 걷고 나섰다.
그는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으로 상업 활동이냐 대한제국 국민으로 돈이 안 될 뿐만이 아닌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민족운동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 속에서도 대한협회(1907), 신간회(1927~1931)의 구성원으로서 활동을 꿋꿋하게 이어나갔고 군산 객주로 활동하면서 모은 부를 활용해 민족운동가의 지원과 직접 민족운동을 하는 것에 몸을 사리지 않았다.
군산은 풍부한 식량과 어수산물, 호남지역의 해상 교통의 중심지이자 유통망이라는 핵심 배경이 있었기에, 김홍두 같은 객주가 나타날 수 있었다. 김홍두의 활동과 지원이 민족운동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면 근․현대사에 있어 군산은 주연은 아니었을지언정, 역사적으로 중요한 조연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