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풍부한 식량을 자랑했던 호남지역의 군산은 우리나라를 식량 공급기지로 만들려는 식민지 농업 정책이었던 ‘산미증식계획(1920~1934)’의 대표적 미곡 수탈항구로, 가을이면 일본으로 반출할 쌀가마니들이 군산항을 덮을 정도로 쌓여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위해 대표적으로 미두장(미곡 취인소)과 정미소와 미선소, 쌀의 좋고 나쁨을 가려 일본으로 반출하는 미곡 검사소 등이 존재했다.
군산항 동쪽 부근에는 정미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지대가 대규모로 형성돼 있었다. 1930년대 군산에서 만석 이상을 생산하는 대규모 정미소가 14곳, 그 중 5만석 이상 생산하는 정미소는 6곳이었다.
민족의 먹거리이자 노동력 착취를 통해 얻은 쌀을 일본이 얼마나 빼앗아 갔는지 당시 한국인의 부족한 식량은 만주에서 들어오는 조, 수수, 콩 등의 값 싼 잡곡으로 충당했다.
1912년 15만 석이 수입되던 만주산 조가 1930년대에는 약 12배에 이르는 175만석이 수입되며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보내졌다. 1920년대 초반에 비해 후반기에는 쌀 생산량이 기존에 비해 1.5배 이상 늘어났지만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1/3가량 감소하고 일본으로 반출되는 양은 오히려 3~4배 증가해 우리민족은 풍요 속의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식민지 근대산업 시기를 이끌었던 고무신사업이 시작된 유래는 개항(1876)이후 일본의 영향에 의해 시작됐다. 일본 고무신공장은 1886년에 처음 생겨난 후, 고베지방에 많이 설립됐다. 1916년 고베 상인들이 우리나라에 고무신을 처음으로 수출하자 당시 나막신, 짚신, 당혜를 신던 사람들에게 있어 빗물이 새지 않는 고무신은 파격적인 발명품이었다.
당시 고무공업으로 유명했던 일본 오사카, 고베지방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군산에 고무공업이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배경은 고무신의 원료인 천연고무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변질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가황공정을 거쳐 경화시킨 후 고무신을 만들어야 하는 고무공업의 특성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경성고무공장의 창업주 이만수 사장은 군산에서 1924년 11월 무렵에 경성고무 공업소를 창립해 고무신 소매 사업에 뛰어들었다. 소매로 시작했던 고무신 사업을 착실히 성장시켜 도매업까지 범위를 넓혀가며 착실히 경성고무의 규모를 키워나가던 이만수 사장에게 하루는 일본인이 세운 고무신 공장이 시장에 매물로 나오는 일이 생기게 된다. 이만수 사장은 이는 큰 기회라고 생각하고 공장을 인수해 1932년 11월 13일 경성고무공업사를 설립했다.
이는 한국인 기업가에 의해 설립된 유일한 중소기업으로, 이후 시대의 변화에 따른 소비자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검은색이 아닌 하늘색 고무신 같은 다양한 색의 고무신을 개발했고, 이후 꽃무늬 고무신과 농구화, 실내화, 슬리퍼 등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서울 이북 지역에서는 삼천리표 고무신, 서울 이남 지역은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최고 인기 상품으로 여겨질 만큼 고무신 산업계를 양분하며 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 이만수 사장의 아들 이용일 사장이 1957년 경성고무 전무로 취임하고, 1964년에 경성고무 경영을 맡게 되었다. 아버지의 고무신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이용일 사장은 고무신 생산에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고 접목 시키며 고무신 사업에 큰 획을 그었다. 뿐만 아니라 고무신공장 내에 방직공장과 철공소까지 두면서 고무신과 다양한 디자인의 운동화 생산을 위한 연구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경성고무에 취직한 시기의 이용일 사장은 고무신 사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야구계에도 큰 획을 남기게 된다. 군산에 야구부를 지닌 학교가 적다는 것을 알게 된 이용일 사장은 학교 내 야구부 창단 작업에 착수한다. 1957년에 몇 군데 초등학교에 야구 장비를 지원, 이후 1968년에 군산 남중과 역전의 명수로 불리는 군산 상고 야구부를 창단했다. 뿐만 아니라 1979년에 초․중․고․대학교 연맹을 협회로 통합하고1981년에 프로야구를 만들어 초대 사무총장으로 있었으며 한국 야구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야구계의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는 경성고무의 쇠락이 함께했는데, 1970년대 초에 고무신 외에도 폴리우레탄과 스폰지를 생산하며 경영난을 타개하려 했지만, 1972년 이후 큰 화재가 3차례에 걸쳐 잇달아 일어나고 수출부진으로 인해 적자에 시달려오다 결국 부도로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