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식에 앞서 호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인 3·5만세운동 재현행사를 기관단체장, 독립운동 유가족, 자원봉사자, 학생 등이 참여해 그 일대를 평화대행진을 통해 진행했다.
또한 평화대행진을 하며 만세운동과 그날의 애환을 담은 시낭송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실시, 참여하는 시민들에겐 군산시민으로서의 자긍심과 애국심이 고취시키고, 학생들에겐 올바른 국가관 확립을 통한 보훈문화를 확산시켰다.
이와 함께 3.1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3.1절 기념 백일장․미술대회를 오는 25일 10~12시에 지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구암교회와 3.1운동 기념관 광장에서 개최하고, 역사 사진전을 1일부터 25일까지 군산3.1운동 선교기념 타워(6~7시), 구암교회 전망대에서 가진다.
김영만 3.1운동기념사업회장은 “4년 만에 개최되는 기념행사인 만큼, 많은 군산시민과 학생들의 참여로 보훈문화가 확산돼 세대 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의 한 관계자는 “이번 3.1운동 행사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국가유공자와 독립유공자 등 국가에 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예우하는 마음을 가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나흘 후인 1919년 3월 5일, 군산에서 3.5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구암동산에서 발원한 3·5만세운동은 한강 이남 독립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거사로 총 1,000여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그 이후 모두 28회에 걸쳐 3만 여명이 참가한 독립운동이다.
군산은 전라도 일대 물자 수탈 무역항구로 활용하기 위해 일제시대에 급속도로 성장한 지역으로, 우리 고장에서 생산된 쌀 반출량이 상당해 일본에 대한 감정이 더 좋지 않아 3.5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3.5만세운동은 김병수(당시 세브란스의전 학생․영명학교(현 제일중고) 졸업)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전달받아 군산 영명학교 스승인 박연세, 이두열에게 1919년 2월 28일에 전달함으로써 구체적인 거사가 시작됐다.
이들은 애초 3월 6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하지만 3월 4일 새벽, 일제에 발각이 되면서 주동자들이 끌려갔다.
이에 김윤실 교사를 중심으로 격분한 학생들이 모여 3월 4일 잡혀간 그들의 석방을 위한 시위가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됐으며, 또한 일본 경찰의 만세 시위 진압이 자극제가 돼 1919년 3월 5일에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3.5만세운동은 28회(3만700여명 참여․사망 53명․실종 72명․피해인원 195명)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외세에 조직적으로 저항한 호국정신이 투철했음을 널리 알린 호남지역 3.1운동의 불씨가 된 거사다.
또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켜내려 했던 군산의 선열들에 의한 한강이남 호남 최초의 거사였고, 전북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를 냈으며, 선열들의 애국∙애족에 대한 숭고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황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