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특성과 본질은 문화를 지각하는 주체들의 시각에서 느끼는 ‘현실’과 ‘대칭’으로서 일어나는 차별성에서 온다. 특히 이 문제는 고유문화 중 식문화 <먹을 수 있는 것- edible과 먹을 수 없는 것 inedible>에서 나타난다. 두 명제는 어느 한 쪽에 한정되어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 외에 상대 문화에 국한되는 실체로서 특히 상대 민족문화의 고유성에 종속되는 양식일 뿐이며 생활 속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에서이다. 그 점의 고유 식문화는 미학 기준 측면으로서 육체적인 감각을 지적인 감각에서 비판의 화살을 보내서는 결코 아니 되는 점이며, 또 어느 한 쪽 문화를 일방적으로 우위의 것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더욱 큰 비약의 논리에서 나온 모순들이라 하겠다. 오직 먹는 즐거움이란 그들 문화만이 향유할 수 있는 맛의 향연일 뿐, 비난과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음에서 ‘먹을 수 없는’ 것이 야만으로 유추되는 것은 민족적 이기주의 종속 논리에서 온 서양문화 우월의식에 지나지 않음에서다. 환언하면 프랑스에서는 <먹을 수 있는> 표제에 붙어 있는 ‘개구리의 뒷다리 들이’ 영국에서는 <먹을 수 없는>이란 은유로 이해되는 식문화란 그 민족의 오랜 전통이 스며든 관습임에서 그만큼 쉽게 변화하긴 어렵고 또 버릴 수 없는 깊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지시하는 정확한 ‘현실과 본질’을 지각하는 방법이 아전인수적인 내적 갈등들이 부정적으로 표출됨은 어쩔 수 없는 인간 심성의 일시적인 현상일 수는 있지만, 일방적인 백안시나 이웃 문화와 사회적 구조에 대한 배타심은 결코 겸양과 존중으로서의 <똘레랑스(tollerance)= 다름과 그름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우선이라 하리다. 위의 근원이 타민족에 대한 월등의식에서가 아닌 ‘ 나와 너는 다르나, 그른 것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진실과 사랑의 그 실행 점은 현실적인 자 문화는 타문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가운데 인간애로서 발전시켜 나가면 아름다운 세계화는 극대화 될 터이리라! 물론 상이(相異)한 문화가 갖는 외관상의 문제는 기후의 풍토에 따른 타민족의 생활양식이 됨에서 이 문제는 상대 문화의 참 멋을 인정하는 순수한 양심을 지니는 데는 우선 국제적 신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일방적인 배제 속에서 세계화를 구속하는 배타적인 ‘삶의 속박’ 이 타 문화를 무조건 말살하고자 하는 일말의 음모라 한다면 그 행위는 곧 자민족 제일주의 요체인 가학적 음란 증쯤으로 매도되어도 변명할 여지는 없겠다. 사실상 이 지구에 존재하는 어떠한 인간도 한 낱 자연 속의 한 개체 일뿐, 삶이란 영겁 속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다는 점과 식 문화의 미적 가치 또한 변하는 것이며, 세계 속의 우린 또 자연과 더불어 질서에 따라 변화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리다. 꽤 오래 전 ‘보신탕’문화의 야만성을 비난한 한 외국 유명 여배우의 날카로운 수사에 희화적인 반감이 느껴지었 씀에서 만일 인간의 삶과 문화 간극의 참의미를 깊이 알고 싶은 어느 누구라 한들 논어의“위정 편”을 꼭 한번 읽어보도록 권유하고 싶다. 정녕 동물 애호가 그녀의 뜨거운 가슴일랑 타민족 분열 운동가로서가 아닌 진정 세계화를 향한 인간애의 열정이기를 바랄 뿐임에서 극단적인 콤플렉스는 지나친 우월감, 성급 성, 격정 등으로 변질되어 남의 입장을 생각지 않는 또 사랑이 없는 열정 그건 한 낱 사상의 허무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다는 그 언표를 발문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