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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양 영식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9-02-22 13:13:51 2019.02.22 13:13:51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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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구 중에서 생명 유지에 대한 욕구는 ‘항상성(恒常性)’의 지속에서 시작된다. 이 항상성은 지구의 모든 생물체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과 균형의 힘이다. 만일 우리 몸에 물이 부족하면 갈증의 항상성은 일정한 균형 상태로 유지케 하려는 <물의 지출(소비> 곧 항상성(균형)의 깨짐에서 나타난다.

이처럼 신진대사 활동을 유지하는 데 절대 필요 요소인 ‘물’의 항상성과의 聯想에서 ‘오아시스’란 영화 머리에 떠오르다. 이 어휘의 사전적 의미는 사막에 존재하며 사람에게 갈증을 해소해 주는 ‘오아시스’는 생명을 유지케 하는 향상성의 본질이기에 영화 <오아시스>는 더욱 더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소외계층을 상징하는 표상의 극중 인물(주인공: 공주와 종두)들이 고뇌 속에서 자괴감에 빠져 할 일 없어, 시간 소모를 반복할 뿐 어떤 존재감도 느끼지 못한 여주인공 <공주>는 오직 친오빠의 장애인용 입주 아파트권 도구로서의 가치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한 존재감에서 탈출을 시도하며 살아 나간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존중 감의 ‘절대성’을 알게 해준 종두를 통해 장애는 극복하며 더불어 순수하게 淸福을 누리게 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공주’는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스크린 위 모습에서 또 다른 사랑의 의미와 상징 그리고 구현의 참 뜻을 이해케 된다.

실제적 현실 사이에서 자기 자신들의 삶이 무의미함과 존재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두 주인공은 존재감의 최대 확장방법으로서 서로의 호칭을 상호 ‘마마’ 와 ‘장군’이라 부르며 상 분신처럼 대하는 無垢한 그들의 밝은 영상이 클로즈업 될 때마다 사랑의 승화와 부활을 보는듯해 기쁨들 너무 진하고 크게 감동되다.

‘참 사랑’의 의미는 서로의 존재감에 대한 연민으로서 오롯하나 인간존재 자신들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섬’이 되듯 스스로 각자를 바라보는 배려와 관심으로서 자기들의 존재감을 채워나가는 두 주인공 앞에 서 우린 몸만 정상이라고 정상인이라고 할 수 없음을 깊게 느끼게 해 준다.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사회의 보살핌만을 받아야 하는 소외된 존재’로서 인식된 영화의 주인공들에겐 눈으로 보이는 겉모습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몸과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며 다름을 인정하는 사랑의 그 순간 위에서 ‘인간의 섬과 섬들’이 서로 굳은 연결로 이어짐을 각성시켜주는 시네마이다.

실제의 삶에서 ‘다름’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 한다면 그 것은 곧 심리적 장애일 터이고, 결손이라 할 수 있기에 <로젠버그>는 내적 강요에서 벗어날 원리인 <공감하기>를 통해 외로움과 화해를 수용한다면 마음의 자유를 얻게 돼 <오아시스>와 같은 ‘또 다른 생의 참 의미’를 앎은 물론 더 밝은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상처 입은 육체와 영혼의 두 주인공은 사뭇 다를지언정, 서로에게 의존하는 실존적인 무구한 인물상 그들의 삶이 ‘천상의 천진 성’이 느껴짐에서, 심리적인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작은 것에 행복치 않고 너무 무조건 큰 것만을 기대하는 현대인들에게 ‘다름과 차이’의 이웃을 다 함께 껴안아 할 세계 동포주의 적 인간애를 자성케 해주고 있다.

‘차이와 다름’이 갈등이 되는 우린 두 주인공의 ‘쓸쓸한 천진 속에서도 아름다움’의 소박한 사랑의 진실 앞에 무너지며, 영혼을 사로잡아 내고 ‘사람 꽃을’ 피어내게 하는 등 마치 사막에서 목을 축일 때의 첫 감동처럼 생명력을 지닌 그들의 모습이 ‘오아시스’의 신비처럼 ‘조화’와 ‘자연스러움’으로 줄이어지면서 줄곧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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