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현상계는 건곤(천지)의 세계로서 보이는 물질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인 비 물질계로 이루어지는데, 인간은 천지의 두 세계 사이 중간에 존재하는 아주 연약한 ‘빙의 성을 지닌 생각하는 외로운 介在적 실존 체’이다.
또한 인간은 보이는 세계(시간과 공간의 에너지가 형체 화된 肉: 물질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靈: 정신 적-내면세계)를 인식하고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소우주적인 피조물로서의 존재인데 그 실존과 종교의 기원을 살펴본다.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 <엘리아데>는 ⒜ 자연발생적인 진화로 ⒝ 초월적인 위력에 의한 두려움의 태동으로 ⒞인간 본성에서 발현되어 절대자의 형상으로 이어진 자체가 곧 종교라는 성서 설로 ⒟ 절대 지배세력이 무지한 대중을 지배키 위한 부산물이라는 부정성으로서 피력한다.
어찌하든 종교란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영성의 울림(힘)이 되어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성으로서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선을 지향하며 ‘사랑의 실행’을 여행(勵行)하는 그 중심축에서 의미와 가치들 즉 신의 영광과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점에서 찾게 되리라.
그래서 인류 공동체의 상생에 효율적인 실천력이 도덕-윤리 적으로 승화 하면서 보편타당한 심성과 상통되는 가운데,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와 큰 가르침이 항상 신앙과 체험 내에서 중심 내용이 이루어지고 그 체험이 인정되어서 도덕을 초월하는 체험을 뛰어 넘어야 하리다.
헌데 어째서 우리사회는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고, 위장된 그 神聖에 굴종하여 초월적인 것에 빌붙고 기복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며, 혹세무민의 위세와 형세로서 비인간적인 종교 형태들이 만연함에 때로는 회의 난 속에서 종교의 본질 그 자체를 다시 되묻게 된다.
물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고뇌와 공포의 근원인 불가사의 한 ‘죽음과 삶=비움과 채움의 철학적 은유’ 앞에 인간은 어찌 태어나 죽어 가는 가함에 기독교(=천주교), 불교, 유교 모두 깊숙히 직결되나 기독교(=catholic)에선 “원죄”의 결과로서 죽음과 영혼을 성령의 체험으로서 우주적 공동체와 합류시키다.
한편 불교에서의 죽음은 세속적인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은 ‘각성’으로서 윤회의 쳇바퀴를 멈출 수 있음에서 찾고, 유교의 생사관은 그 연장을 수용 한 후 조상과 후손을 정신적으로 이어주며 개체와 개체를 연결시키는 가족 일체 관의 중심 위에서 찾다.
아무튼 조석으로 종교적 生死一如의 큰 가르침을 찾으며 불가사의 한 ‘철학적 은유의 담론‘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가사의, 분노와 좌절’, ‘충만 과 상실, ‘平凡과 비범함’의 영성 그 안에서 ‘공감과 사랑의 축복’이란 가르침을 우러르는 우리들에겐 종교를 바라보는 느낌이 남다르다.
하지만 불가사의에서 온, 이 生의 황량함들 <전쟁과 기근, 골육상쟁과 살육, 협잡, 상호 불 소통, 부조리> 등이 벌어지는 현실 앞에 사랑과 자비들 그득히 나타남은 물론 불행과 재앙을 피할 기복적 신앙에만 매달리는 오늘의 모습에서 벗어나, 自我를 초월하여 他我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랑으로서 온 세상 평화의 의미들만 피어오르게 하소서.
줄 곧~, 서걱거리는 종교의 벽을 넘어 이젠 평화와 화해의 울림 영성의 소리에 깊이 빠져들어 ‘불가사의-천국, 극락. 幽玄’의 세계에 이르는 고뇌 속에 이어, 마침내 참 종교의 길인 <永生>과 참 생명에 이르는 긴 여운의 사유로 깊은 기다림의 메시지와 실천의 계시들로서 충만을 느끼게 하소서!
아~아, 오직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일관된 “용서와 사랑” ‘영성의 종교적’ 울림들 온통 두루두루 널리 펴지며 큰 뜻 축복어린 세상 종교의 거룩함과 <평화와 사랑>으로의 아름다운 빛 가득한 ’은유 체계 의미망‘의 울림에 덧대어 보며 간절한 그 바람들을 그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