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웅 (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1. 근대 의병의 항쟁 시작
의병은 국가유사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의용병이다. 근대 한국의 의병은 일제침략에 대한 무력항쟁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주로 유생, 전직관료, 해산군인 등이 지도부를 형성하였고 농민, 소작인, 도시빈민층이 그 하부를 구성했다.
한말초기 의병 중심세력은 이항로의 사상적 계보에 속하는 유생 의병으로 이들은 개항기 개화에 대한 반대적 입장에서 창의 호국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즉 이항로, 최익현 등의 지도로 전개된 초기 의병운동은 대외적으로는 무너진 봉건사회를 재정비하려는 복고적인 운동이기도 하다.
1895년 일본의 흉계로 저질러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같은 해 일본의 강요로 실시된 단발령과 내정 개혁은 의병운동 시작의 단초가 됐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무력간섭 아래서 급격하게 추진되었던 여러 개혁 조치는 조선의 주권침탈행위를 식민통치로 보고 이에 대항하는 의병활동의 봉기를 가져왔다.
을미사변 역시 그와 같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그것이 유교사상을 사회윤리이자 생활 철학으로 삼고 있던 일반 백성의 정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에 커다란 반감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러한 반감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현실에 대한 의식과 맞물리면서 일본에 대한 무력 항쟁으로 나타나게 됐다. 근대 의병은 바로 이렇게 시작됐다.
* 호남절의록 : 조선의 5대 난 임진왜란(1592.선조25), 이괄의 난(1624.인조2), 정묘호란(1627.인조5), 병자호란(1636.인조14), 이인좌의 난(1728.영조4) 이러한 난이 있을 때마다 자진하여 의병들이 일어났다.
2. 임병찬의 역할
임병찬은 1851년 2월 5일 옥구현 서면 상평리 남산 마을에서 아버지 용래와 어머니 송악 왕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돈헌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세에 천자문과 추구를 배웠고 5세에는 사자소학과 오언당서 등을 배웠으며 7세 때 통감을 외우며 오언을 지었다하여 신동이라 불렀다
.
15세에 함열에 사는 임천 조씨와 결혼을 했으나 불행히도 일찍 여의고 태인매죽에 사는 여산 송씨와 재혼을 했다. 1856년 16세 때에는 전주에서 실시하는 지방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17세에 그는 옥구형방을 시작으로 전주 감영의 예방, 공방을 지냄으로써 아전생활을 하였다. 22세에 옥구의 호장이 됐다. 호장은 민호의 장이며 읍사의 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직책으로 1877년까지 아전 생활이 계속 된 것으로 추정된다.
1882년 그의 나이 32세 해에 고향은 옥구를 떠나 태인면의 산간벽지인 영동으로 이사했다. 고향을 떠난 것은 임오군란(1882년)으로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에서 살려는 뜻이 있었다. 1886년 전주 감영의 대동영리가 되어 전주에 근무하게 됐다.
이 무렵 정부에서는 거문도에 진을 설치하고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고자 했다. 이는 1885년 영국 함대가 무단 상륙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돈헌을 이 곳 거문도 감독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제수하고 그의 아버지와 조부, 증조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추증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또한 돈헌에게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 병마동첨절제사로 제수하여 낙안 군수로 부임을 했다. 그가 재임동안 선정을 베풀자 군민들은 이를 찬양하기 위한 선정비를 세우려 했으나 돈헌의 엄금한 지시에 따라 세우지 못했다는 일화는 귀감이 되는 향리의 선정이었다.
1890년 그는 낙안 군수에서 물러나 잠시 머물다 1893년 산내면의 송종리로 이사했다. 이 마을은 순창군과 접경인 회문산 아래에 있는 곳으로 그가 후진을 양성하는데 적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홍학제’라는 학당을 짓고 학문과 무술을 가르쳤다.
3. 면암 최익현, 임병찬의 병오창의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내정을 장악하는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국권을 빼앗고 식민통치가 시작됐다. 1906년 2월 30일 최익현은 찾아와서 첫 대면을 했는데 돈헌은 면암을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올리고 사제의 정의로 깊게 맺어져 면암 옆에는 언제나 돈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 된 이후 호남의 의병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1906년 6월 최익현의 봉기였다. 전직 관료 최익현은 당시 척사파 우두머리로써 전국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을사조약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중 송병선의 순절소식을 듣고 의병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는 정의롭고 충성심이 강한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고자 태인으로 출발하여 임병찬을 만났다. 4월 8일 담양 용추사에서 기우만과 이 지역 선비 50명을 만나 결의를 다졌다.
그는 ‘모두가 힘을 합해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 지르며 역적의 도당을 섬멸하여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자’라는 내용의 경문을 작성해 순천, 고흥, 여수, 돌산, 광양, 보성, 강진, 해남, 완도에 전달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4월 31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열어 일본이 저지른 죄 16가지를 성토했다.
그 중요내용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죄, 동학농민전쟁 때 궁궐을 침입한 죄, 을미년의 국모시해(명성황후시해), 이권침탈, 토지점령과 친일분자 추천죄, 한일의 정서강요, 충신과 공론을 막은 죄, 일진회 협죄와 애국 단체 탄압, 한국인의 매매, 통신기관 장악, 고문정치, 차관제공과 한국 재정소비, 을사조약 강요 통감의 정치관여, 이민규정 제정 등이었다.
이후 그들은 태인, 정읍, 곡성, 등지를 거쳐 순창에서 거병하였다. 그러자 흥덕의 고용진이 포수 30여명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4월 15일 정읍을 점령하여 무기고를 접수했다. 16일에는 순창을 점령해서 부서를 새로 정하고 왜병 10여명을 성 밖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최익현 부대는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 병사들과 순창에서 대치했는데 “동족끼리 죽이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 하여 싸움을 중단하고 무장을 해제하고 말았다. 최익현 자신과 임병찬 등 12명은 토벌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최익현은 징역 3년, 임병찬은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7월 8일 면암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로 압송되었으나 최익현은 11월 17일 식음 전폐로 순절한다.
②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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