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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고봉민 의사, 항일의병대 역할과 활동-②

대한독립의군부 의병대 중심으로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19-06-10 15:33:35 2019.06.10 15:33:35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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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웅 (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4. 의병장 고봉민 의사의 대한의군부 역할과 활동

고봉민의 의병 참여= 고봉민 의사는 1863년 6월 26일에 옥구군 옥구면 옥정리(현 군산시 옥구면 옥정리)에서 고려초 문충공 고경의 19세로 부친 고인시와 모친 전주 이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독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고씨며 자는 일서요 호는 송재로 배우자는 서표산이다. 고봉민 의사는 슬하에 전 옥구향교전교와 성균관부관장을 지낸 아들 고수장과 전 재무부차관보와 전 건설부장관(현 국토교통부)을 역임한 손자 고병우 그리고 전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을 지낸 증손인 고승범이 있다.


송재 고봉민 의병장은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맹주인 면암 최익현, 돈헌 임병찬이 주동해 일으킨 무성서원 병오창의에 솔선하여 참여했다. 임병찬 장군에게 밀지를 내리면서 고봉민 의사에게도 특승 종3품 통훈대부의 작위를 내렸으며 또한 독립의군부 전라 순무영 경리관과 만경군 소모관으로 임명했다.

밀령을 받은 고봉민은 소유하고 있던 재산과 농토를 처분하여 시급한 군자금으로 조달하는 한편 모병활동에도 전력을 다했다. 고봉민은 순무영활동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난 1914년 3월 23일 수원에서 동지였던 김창식이 체포돼 고문에 못 이겨 모든 조직의 비밀을 자백함으로써 일본관헌에 체포돼 옥고를 치루는 와중에 기울병과 풍증까지 발병했다.

1916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관인 임병찬이 왜군에 체포돼 거문도에서 유배중 자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고봉민은 실어증까지 겹치면서 3여년의 혹독한 옥고 끝에 석방됐다. 중환자로 귀향한 후에도 줄곧 3년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1919년 3.1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섰으며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병이 겹치면서 지병이 악화됐다.

부인 서표산의 간호를 뒤로 하고 망국지탄 속에 순국한 열사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순절을 높여 1990년 12월 20일 독립유공자로써 건군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5. 대한독립의군부의 구성과 활동

일제하의 의병투쟁이 소규모적이고 산발적인 상태에 봉착했던 근본요인은 헌병경찰제도의 실시와 더불어 가중되는 탄압에 있었다. 따라서 무력항쟁으로서의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은 해외에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전환기를 맞았으며, 국내의 경우 헌병경찰의 철저한 감시를 피해 지하조직으로써 비밀결사 운동으로 전환돼 갈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대한독립의군부의 조직과 운동은 이제까지 밝혀진 독립운동연구 가운데 일제 강점 이 후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써 최초가 아닌가 생각한다.

1912년 11월 6일 고종의 밀령에 의해 비밀리 조직되고 전개되었던 독립투쟁이 바로 독립의군부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전국적인 독립투쟁으로써 이전의 의병운동의 조직과 활동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독특한 방향과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종은 충청도 공주지역의 유생이던 이무를 통하여 비밀리에 임병찬에게 전교한 교지와 밀령을 보면 ‘종2품 가희대부 임병찬 명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자. 건국 521년 9월 20일(양력 10.29)’. 고종의 밀지 내용을 보면 임병찬을 종2품 가선대부로 삼아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한다는 교지인데 이 칙령을 통해 볼 때 이를테면 호남지역, 충청지역, 경상도지역 등과 같이 전국을 몇 지역으로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역책임자로써는 순무대장이라는 직책으로 임명했다. 또한 지역별 순무대장에게 해당지역의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그에 필요한 인사선발 등 제반 사항에 대해 순무대장에게 자량권이 주어졌다. 끝으로 독립의군부의 투쟁방법과 방향은 고종의 칙령에 의해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보필할 수 있었던 인사들에 의해 조직과 방법이 토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독립의군부 조직을 바탕으로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각 지역별 대표의 선발이란 의심할 나위 없이 국권회복과 독립정신의 인사들이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이전부터 의병투쟁과 같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던 인사들이거나 조직 당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인사가 주착이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를테면 돈헌 임병찬의 경우 또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된 배경도 1906년 의병투쟁을 전개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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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2월 23일 도와 군의 대표를 선정한 의군부의 조직을 보면 의군부 총 대표 13인, 각 도 대표 14인, 각 군 대표 302인으로 전국적 군대조직을 했었다.


이 조직으로 군산지역은 옥구군 대표로 고봉민 외 김덕장, 이준영, 전오풍 등 20명. 임피군 대표로 이춘길 등 15명 도합 35명이 참여했다.


독립의군부 적국적인 조직을 갖춘 채 무력항쟁을 전개함은 물론 외부로부터 도움을 함께 이끌어내면서 한국의 독립을 만회하려 했던 것이다. 의병은 비조직적이며 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대한의군부는 고종에 의해 조직된 적극적인 의병대의 군사조직인 것이었다.

 

6. 의병장 고봉민 의사의 역할


독립의군부는 주무대신으로 대표자였던 이명익과 이인순 그리고 임병찬 등이 1914년 3월에 서울에 모여 구성됐다. 이 회의서 각 도, 각 군 대표자를 1차로 선발하였는데 옥구는 고봉민을 비롯한 19명. 임피 15명이 군대표로 임명을 받았다.

​이로써 고종으로부터 고봉민은 ‘특승 종3품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영 경리관 겸 만경군 소모관’으로 임명을 받았으며, 대한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영 제반 경리를 맡았으나 군재정이 없으므로 의병활동이 어려움을 겪을 때 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과 농토를 전부 처분하고 시급한 독립의군부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모병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고봉민의 군사 재정인 군자금의 조달로 전남북의 의금부 활동과 조직 그리고 모병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7. 결언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약 40일간에 걸쳐 단행된 남한지역 의병대토벌 작전이 전개됐고 이 기간 동안 의병의 탄압과 수색이 그들의 예상했던 성과에 미치지 못하자 토벌기간을 연장(10월 25일까지)해 실시해 국권회복운동으로써 의병투쟁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이로써 무력투쟁은 실질적으로 어려워졌다. 이 작전으로 임병찬과 고봉민을 비롯한 의병 지도자들이 대부분 체포됐거나 일부는 만주 등지로 이동했다. 임병찬은 체포돼 거문도로 유배 돼 그곳에서 순절(66세)했으며, 의병장 고봉민 의사는 혹독한 옥고 끝에 병사(57세)하는 아픔의 역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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