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불화는 불행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분쟁이 극심한 시대다. 국제정치, 국내정치가도가 분쟁의 연속성을 갖는 불안한 시각에서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탐욕이 자초한 불행이라는 주장이 일기 때문이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勸賣買:권매매, 鬪則解:투칙해) 전래된 속담에서도 다툼은 우선 말려야 도리다. 우리는 이웃나라들이 많은 괴로움을 주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진부한 얘기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동족이라는 북한은 스스로 적대국임을 자처하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눔의 쌀을 준다고 해도 거부하며 납득이 어려운 정치를 한다.
1950년도에는 탱크를 내세워 엄청난 피해를 냈고 이제는 핵을 흔들면서 겁박 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논리를 갖고 해법을 찾으려 해도 미사일 실험 발사 등 무력을 과시하는 모습만 연이어 표출하고 있어 난감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는 용어가 실감날 만큼 고민에 빠져들었다. 지구촌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 사실상 동정과 우려의 메시지를 보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이 증발된 이웃나라들을 바라보며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가로 살아가는 것이 지겨울 수준에 이르고 있다. 실력을 갖춘 지성인이 모자란 나라가 아닌 이상 수렁에서 이제 힘차게 빠져나오는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비판은 소모다. 해법을 찾는 길은 생산이며 평화로 다가가는 길이다. 감성보다는 이성(理性)이 중요하다. 1971년도에 하버드의 존 로울즈(John, Rawls)교수의 ‘정의론’을 주창하는 논리가 나왔을 때 세계의 석학들은 세기적 대작(大作)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불과 4년이 경과한 다음 같은 하버드의 30대 젊은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t Nozick)은 로울즈 정의론에 상이성 원칙의 불균형을 지적했다. 본질적으로 부당하다는 반론이다. 이같이 논리의 절대성은 풀기가 어렵다.
정의론의 시대는 컴퓨터가 엄청나게 덩치가 컸지만 지금은 손안에 들어있다. 시대가 변화했으면 생각도 신사고(新思考)로 바뀌어 우수한 물질만큼 평화롭고 풍요를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전쟁, 싸움이라는 것 이제 인류 앞에 사라져야 할 괴물이다. 지구는 이상기온 등 몸살을 앓고 있는데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가꾸어 나가야 할 때다.
정치가도의 변화가 먼저다
오늘도 석간신문을 들고 보면 투(鬪)라는 자와 전(戰)이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인쇄돼 있다. 노동계는 하투(夏鬪) 국가는 안보에 대한 전선(戰線) 등 평화로운 뉴스가 메말라 안타까울 뿐이다.
밖이 시끄러우면 안에서는 조금 인내하면서 조용하게 지내야 그나마 안정을 향해 갈 것으로 국민은 바란다. 싸운다고 해서 지구의 땅이 커지는 것도 아니고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다.
빅토리아시대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이 지구(地球)는 한 치도 넓어지지 않았는데 인류는 지속적으로 싸움판만 벌여왔다고 말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협력하는 시대를 떠올리면 정치가도에서부터 새로워지기에 힘을 쏟아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항도군산은 숨고르기가 거의 끝나가면서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시정(市政)의 목표가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공단에도 소규모 계열 협력업체들이 입주하고 있어 희망이 싹트고 있다. 상품권발매가 인기를 끌며 경제회복이라는 대열에 편승하는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변화해야 마땅한 것들이 제대로 길을 찾아준다면 풍요는 분명하게 우리들 앞에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