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명징하게 식별하고 안락과 발전을 기약하며 명성과 다복한 생의 누림을 갈망하는 욕망의 주체적 의미에서의 인간은 어떤 삶의 존재일까 하는 의문점을 ‘정념의 행동성’에서 찾아봤다.
인간이 느끼는 자기감정이나 의식의 대부분이 자신이 선택하며 기쁨을 지향하는 습관에서 온 결과물이기에 그 고유 의미가 정착되는 정념의 현상을 들여다보면 쉽게 현실세계 특질이 발견될 수 있다.
그 속성의 대부분은 스토리텔링-시간성-생로병사, 희로애락의 흔적이 담긴 본질 과 정념의 시간성에 역행하는 욕망의 인자를 고찰하고자 한다면 먼저 겸손, 양보, 진실과의 준거 틀이 꼭 지켜져야 한다.
헌데 그 ‘약속의 준거를 건너는 과정의 삶’에서 정념의 행동성이 바르고 신실하게 결행되는 내면성들 ‘오래 살고 싶고, 늙고 싶지 않다는’ 이율 배반적인 허허로움의 욕망들이 느껴짐은 이의 전율에서이다.
이 의미는 사회적 욕망을 극복하고 존재의 참회를 통한 well aging과 happy aging으로 나이 들어감에 따른 객관적 인식을 체득하며 <어제와 지금>의 순간순간을 즐기면서 겸허하게 살아가는 명징성이 이 <정념> 속에서 나온다 하겠다.
하지만 괴테의 말에서 보듯 때론 ‘인생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라고 한 이 선언에서 바른 삶을 체득하는 게 그리 녹록치는 않다는 사실에서 긴 과거를 헤아려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통찰한 후 혜안으로서 자신의 갈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티베트의 위대한 성자의 詩 <원컨대 마음이 지어낸 생각이 나를 괴롭히지 말며, 불생의 무성한 나뭇잎이 내 안에 무성하게 하소서>로서 행한 고행에서처럼 정념의 행동성은 크게 변화돼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참기 어려운 변화에 다다를 땐 할 일도, 오락도, 집착하는 일도 <기망>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마음기저에 머물고 있는 허무, 무력감으로 공허가 몰려옴을 느낀다 할 때에는 먼저 타자에 대한 ‘미움’을 완전히 불살라야 하리다.
그러고 난 다음에 우울, 비애, 고뇌, 원망, 절망 등 허무감의 불순물들을 진심을 다해 불필요한 곁가지를 제거해 나아가게 하면 ‘정화된 정념’이란 역시 깊은 명상에 귀착케 되는 점을 알 수 있으리다.
이때의 마음 순환 과정에서 ‘義=옳음-양심-도리’를 바탕으로 삼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파열음이 황폐해져 물신숭상의 지향에서 상처 입은 요소를 ‘감정 정화’차원에서 자연을 통해 하나 되는 healing의 대체 요인으로서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오랜 체험에서 온 인간의 삶이란 여정은 분명 well-being의 무늬와 well-dying의 무늬로서 일생이 마무리되는 ‘정념의 행동성’으로서 발현되는 과정일 터이기에 스스로를 정념의 행동성에 맞혀 보며 거울 속에 비친 내 자신의 정신적 혼돈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에 잠겨 보시면 되리이라.
그러므로 우린, 때때로 ‘이 산 저산’의 멋진 풍광 속에 빠지어 산야 전체를 종주해 보거나 자신과의 타협에 굴하지 않는 일상의 ‘익숙함’을 버텨내면서 ‘아집’과 ‘편집성’을 극복해 가며 그 두려움에 그저 담담하게 만족하고 이해하면 족할 것일 터입니다.
그렇다 해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그 시간의 흐름과 매듭으로 빠질 질 땐 바르지 못한 틈새 속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반복함으로써 태만함에서 뭔가 흐지부지 한 자신의 행동을 복기해보면 쉽게 해결될 수 있으리다.
위기가 반복되는 시간성 속에서 얻게 되는 큰 교훈이란 “지혜의 원체험의 과실이 넘쳐나게 하소서”라 읊조리며 정념의 고통에서 진리의 길을 나선 <밀라레빠>처럼 어제와 오늘이란 그 시간성을 잊고 탐욕과 쾌락을 내려놓는 순간과 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자연의 작은 한 부분으로서의 미약한 존재라는 ‘마음의 울타리 경계성’을 찾아 나서는 삶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