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팬데믹은 인류 문화를 재앙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일상적인 의식전환에서의 코로나 상황은 신축년을 맞은 지금까지 언제 종식 될지 알 수 없음에 세계는 충격에 빠지며 방향을 잃고 서로를 탓하며 거대조직의 중심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점차 개인 기반의 ‘소 서사’로의 문화 환경은 더욱 더 확대될 것이리다.
이 위기는 어찌 보면 인류가 자초한 것, 그 불화와 불안한 마음을 다독일 심사에서 카뮈의 작품 ‘시지포스 신화’의 유명한 첫 구절을 살펴보며, 삶에 중요 문제와 가치 및 그 근본은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끼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더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고 한 그이 삶의 소망을 조망해 본다.
이 같은 위기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의 큰 과제이겠고 지금까지의 협동심은 경쟁심으로 대체되며, 소소한 비리가 사라지는 대신 시스템 조작에 의한 대규모의 파멸인 문명의 몰락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할 이 시점에서 우린 새로운 인터넷 문화와 인간관계를 정립해야 할 중대함에 봉착해 있다.
다시 말해서 코로나 19 ‘팬데믹’의 위기는 일상에서 ‘노멀’의 참혹함이 여지없이 드러남으로써 이제 인류가 살아나갈 ‘뉴 노멀’ 세상의 새 패러다임의 등장으로 비 접촉세계로의 전 국민적 체험들은 개인주의가 극대화 되는 등, 몰 인간화가 심화되는 새 시대의 도래는 밀물처럼 밀어 닥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팬데믹 페스트는 1347년 유럽에서 창궐, 유럽인구 1/4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세계인구의 1/3을 전염시키는 등 많은 사망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반해 과학의 기술이 엄청 발전한 21세기에 코로나 팬데믹 확진 자 8,000만 명과의 차이점은 디지털 시대 덕택에 시공의 현상들을 실시간으로 경험할 뿐, 그 질병으로부터의 위험은 줄어들지 않고 있음에 위기는 더 심각하다.
뒤돌아보니,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 공동체의 최고선이란 ‘자유와 평등’에 의한 정의로운 사회라 했음에서의 고려는 인류의 생존이란 다양한 의미가 있음에서 곧 더불어 살아가야 할 우리사회가 ‘비대면 문화 현상’의 사회적 경향 화에선 ‘기회와 위기’가 양존하나 오히려 ‘상실의 비중’이 더 클 것이란 예견에서 실망감을 느끼는 것이리다.
그러함에서도 우리는 서로 단절되거나 고립되기 위해서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또는 더욱 밀착된 사랑으로 연대하기 위해 팬데믹을 두려워하거나 위축됨에서 빨리 벗어나서 삶에 유연한 새 선택을 함으로써 인간관계를 ‘따뜻함’과 ‘다정함’으로 평가될 <측은지심>의 사회체제를 단단히 구축해야 될 것이라 하겠다.
오늘은 새로운 위기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찾아야 함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알제리 가상의 도시 ‘오랑’시는 외부와 단절된 주민 공동체가 질병에 맞서 싸우면서 보인 반항하는 실존적 지성인이며 현대를 대표하는 주인공 의사 <리외>, 그 곁에 <그랑>이라는 시청 공무원 맟 수오지심을 지닌 양심적인 <랑베르> 신문기자 등과 사랑의 화신 파놀루 신부가 등장한다.
이들은 다 같이 페스트와 맞서 싸우지만 그 이유와 방식은 각각 좀 다르다. 이 질병은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파놀루 신부, 이와의 대결은 신앙을 넘어서 초월적 영역의 싸움으로 간주하는 외지인 랑베르, 그는 오직 영웅주의를 배격한 관념적인 휴머니스트로서의 작중 인물이 되고 있다.
물론 인간은 관념만을 지니지 아니했기에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말하면서, 이건 단지 성실성과 진정성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 그 일체와의 인간적인 감정, 말하자면 동정심 아니 연민 또는 공감성이다. 이렇게 외치면서 투쟁의 끝에서 우리 모두는 오직 ‘사랑’의 실체만을 만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고 있다.
그래서 끔찍한 이 질병들이 끝없는 패배가 될 지라도 ‘어떠한 환상이나 체념도 없이 그저 그 일을 지속해나가는 것일 터에서’ 그 싸움의 주체인 역동성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며, 사랑 그것은 <이기와 이타애>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한결같은 성찰에서 우리가 느끼는 사랑이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받아들여야 할 주장함에서 또 다른 깨달음과 울림을 준다 하겠다.
‘사랑’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있어서 코로나 팬데믹은 경제와 정치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친 변화의 혁신을 통한 새 행동양식과 새로운 인생관 및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음과 다른 한편으론 나와 내 이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도 동시에 깨달아야 할 사항의 중대사이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에서 실존주의 작가 카뮈는 페스트에서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다. <사람들이 광장마다 모여 춤을 추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영혼의 불빛을 낮게 줄이고 살아온 지난 몇 달 동안 비축했던 생명감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고.…>
위 소설의 내용처럼 이 환희의 순간들이 우리에게도 한 순간이라도 빨리 와야겠지만 그렇기 위해서 소시민인 우리 모두는 자기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겠으며, 삶의 전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요구됨에서 카뮈가 거론 한 바 <삶에 대한 절망 없인 삶에 대한 사랑은 있을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아~아, 지나 긴 이 순간들을 또다시 떠올리어 보면서, 인간은 언제이든 ‘불안’이라는 것에 사로잡히게 마련이기에, 그것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바로 그 불안을 통해 소시민 우린 우리의 현실세계를 이해한 후 최적화된 현실을 극복하고 초월해야 할 평범한 경구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인간은 공허하고 황량한 세계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던져진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고 직시해야 함에서이고, 위기의 세계가 제공하는 기만적인 가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인식하는 존재자로서 다시 태어나 또 다른 자아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실질적이고 바람직한 참다운 삶으로써 극복돼야 할 최적의 방식이기 때문에서이다.
이젠 우린 일상에서 ‘나와 남’과의 관계에서 무엇 보다 중요한 공존의 길이 된 마스크 착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이타주의 적 삶의 작은 실천들은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는 동시대에 최선의 해법이 됨에서, 한편으론 팬데믹 이후 우리에겐 백신이 절대가 아님도 또한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거리두기와 <개인 및 공중위생> 문제 등은 물론 소위 ‘일상’의 문명과 ‘야만’이란 과거로의 회귀라는 두 가지의 기로에 서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서 자연과 분리된 인류 문화에 새로운 성찰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보건데,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 등 향 후, 도래할 ‘기후위기’ 변화에 의한 심각한 재앙이 닥쳐올 미래와 자연의 재난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임을 발문으로 한다. <ilminson1@hanmal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