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박사․문학평론가 양 영식
<ilminson1@hanmail.net>
행동과 배려의 형성 결과인 은유(隱喩:metaphor)에 대해서 <괴테는 인간에게 있어서 지나간 일은 모두 은유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지나간 사상(事象)에는 언제나 의미심장한 형태의 특유한 은유 공간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와의 편린인 시련과 고통의 세월은 지나가면 다시 아름다운 추억으로 반전되듯 현실을 거슬러 실제를 거울에 비추어 보면 반사된 삶의 영상과 풍광들이 아름답게 보이나 보다 더 멋진 時空(시공)의 아름다운 세계들은 돌고 돈 始原(시원)의 재생 공간일 뿐이리다.
물론 어떠한 관념도 스스로 구성될 수 없음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하며 순수 세계를 回憶(회억)하는 과정 중 혹 마음이 꽃처럼 활짝 피는 계절, 그 매개 현상인 ‘아름다움’에 대한 합리적인 상상은 채색된 사물의 시공간을 넘어 새롭게 체색된 상상 공간임에서이리다.
허나 이 현상에서 과학은 <참과 거짓>의 식별이 가능할 터나, 감수성이 높은 어느 누가 청라 언덕의 봄 자락에서 한 폭의 수채화를 회상할 때의 근원들, 아름다운 것을 더 오래 사랑하고 싶고, 오래 보고 싶으며, 오래 간직하고 싶음의 앞에서 삶의 참 요소들이란 심상 적인 스토리와의 연관물이다.
그러므로 관념의 眞(진)이 아닌 경험의 실체들 즉 치환된 통찰과 상상력의 갈래에서 본 ‘꽃’의 아름다움은 과학적 방법이 아닌 심상 적 가치 판단의 기준임에서 만약 인문학적 기준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정의’편에서 본 사회적 기준이 없다면 일상적인 우리의 삶은 참 삭막했을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상상적 비약을 통해 사랑의 삭막한 비약에서 벗어나 궁극의 목표인 생존과 생산의 공간을 인지한 후 이원적 감상 속에서 꽃처럼 아름답게 피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염원하며 시공과 실존 한계 본질을 다시 재생해내는 다른 상상 공간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 이승과 저승, 여기와 저기, 인간과 神(신), 가시 세계와 불가시적 세계를 연결하는 수단인 차안과 피안의 시공 속 윤무를 섭렵하면서 시인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 아래’에 센 강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가, 우리의 사랑도 흘러가고 있다‘는 상상의 꿈과 피안의 심적 세계를 그리며 유기적인 문학성의 생명력인 성스러운 時空(시공)을 표출해 냈을 터이리다.
그래서 우리들은 꽃이 피는 계절에 우리의 마음도 꽃처럼 활짝 피어 내며 아름다운 경계를 그리게 되는 것이고, 세월 속에서 체험하는 自我(자아)의 내성에 따라 채색되는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서 문학 세계를 동경하며 이상화 하면서 우리의 삶은 공명되며 진동케 되는 것이리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인생무상’ 속에서 유의미 해지는 것이며, 차안과 피안 속에서 갈등과 허무를 동시에 느끼면서 자아와 조우하는 사건에서 보다 오히려 자아가 받아드리는 <사랑과 믿음>의 감수성에 따라 삶은 행, 불행의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오욕칠정의 고뇌에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삶의 활력과 숨결을 느끼는 순간 ‘꽃들이 나처럼 웃어보세요’ 할 때 우린 그 기쁨을 인식하고 형형색색의 꽃을 피워 자태를 뽐내는 봄꽃들과 함께 아름다움을 펼치어 낼 수 있다면 어떤 재물이나 명예보다도 더 인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랑의 환희’로의 상상에 빠지는 사유는 가능하고 충분할 터이다.
아~아, 그 應戰(응전)에! 우린 지금 여기에 서서, 어둠보다 광명을, 절망보다 희망을, 죽음보다 생명을, 저주보다 사랑을 향한 꿈의 세계로 <희망>, <생명>, <사랑>, <자유> <환희>가 가득한 은유의 세계로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나답게 사는 게 뭘 까를 깊게 마음속으로 되짚어 보시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 다음엔 꼭 현실을 직시하고 공존의 길을 수용하시며 좀 더 깊게 생각을 해 보시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첫 걸음인 고집과 아집 그리고 집착의 덫 들, 아니 이원성의 세계 즉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의 끝까지 아우를 <모두를 위한 세계>는 계속 시공을 넘어 흐르며, 또 다시 다가올 것이란 ‘참 섭리’를 감히 제시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