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박사․문학평론가 양 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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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사유에서 ‘자유, 독립, 평화, 생명’ 등과 ‘부자유, 의존, 전쟁, 죽음’ 등 전자엔 능동과 개성의 ‘축’, 후자에는 수동과 몰개성의 ‘축’인데, 지행합일의 지성과, 선험적 인성인 ‘영성’ 그 속에는 보편적인(충만과 기쁨)의 축이 보이 터나, ‘ID와 Ego’의 미망에 집착하면 (상실-사라짐)의 축이 가득하리다.
그러니 허공을 나는 한 마리의 새와 같은 獸性(수성)의 세계를 뛰어 넘어 인간의 생명 한계와 삶의 근원에 침잠하면서 無慾(무욕)에 잠기게 하면 자연인 나무의 영혼에서처럼 생명의 본질을 이해함에서 어느 누구나 창조 적인 삶에 도달할 수 있으리다.
헌데 상대적 진리인 생태 철학의 구조에서 본 나무는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자연 세계에’ 온 힘으로 내 외면의 명징 속 天命(천명)과 哲理(철리)의 영적 세계와 가치의 정수로서 창조적이며 조화로운 철학 성이 합일 화 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더하여 시간의 흐름 속 존재에 대한 이해에선 자연의 실체인 나무의 본질은 ‘자기 본분을 지켜내는 일’의 <無償化(무상화) 변화>를 오롯이 나이테에 새겨내는 생태 과정이 너무 아름답고 숭고화 돼 그 ‘영성’의 가치 속에는 진정한 우주 합일의 자연 현상이 담겨 있다 하겠다.
아아~, 이 순간 단순함 속에 완전을 담는 보편적이고 오묘한 나무의 삶에 의미들을 깊이 생각해보면서 자신을 불사른 삶 속에 스미어 낸 신비한 ‘영성’ 그 순수성에 빗대어 보니 미약한 인간들 우리는 그것을 ‘삶과는 다른 것’, ‘특수 인간계의 종교인들이 추구하는 것‘, 아니면 ’약간 정신 나간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오판함에 과연 우리 인간들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사실 상대 진리(靈性)가 절대 진리(知性)보다 더 우월함에서 또 구도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세계는 물질과 정신의 상태로 한 생명이 태어나 소멸하는 중 자연 현상을 깨닫게 될 ‘영성’의 문제란 그건 다름 아닌 세상과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즉 원천적인 사랑의 진정한 원천들이라 하리라.
다시 말해서 함께 헤야 할 삶과 사랑의 관계들 즉 <나와 너>의 공존에 존엄성으로서 인격을 담아낼 초탈의 無垢性(무구성) 그 자체인 <영성>이란 인간이 지닐 잠재적인 본태임에서 가령 지능지수 보다 영성지수가 높음과의 ‘관계성’을 깊이 인식할 의미에서 배려와 감각 능력이 높음이란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원동력이라 하겠다.
그러함에서 사회적 건강 수준은 사회 구성원의 영성지수에 비례해 그것이 높은 義人(의인)들은 작은 촛불로서 사회를 비추며 인격 완성을 다 하는 삶의 실체로써 더 깊은 의미라 하기에 그 세계는 인간 정체성의 본질이 되는 것이리다.
이와 같은 영성의 힘이란 곧 만물에 내재되어 초월되고 서로에게 믿음을 주며, 미래 지향적인 삶으로써 우리 모두는 ‘나 자신을 나답게’ 합리적이고 성숙된 삶으로서의 <지성과 영성>의 세계들은 새 질서를 비추어 내는 촛불과 같음에서 둘의 관계는 전자는 ‘창조의 공간’이며, 후자는 ‘공감의 공간’이라 하겠다.
그래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미래에 대해서 <마르셀 푸르스트>는 어떤 상황도 통제할 수 없는 ‘고독 속의 대화가 만들어 내는 유익한 기적이다’라고 했음에 순간의 능동적 행위는 직접 경험이고, 순수 경험이기에 彼我合一(피아합일)을 直覺(직각)할 때처럼, <자아실현, 융합, 자유와 평화, 탈 물질적 문제가치,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는 작금의 시공간에 <영성어린 창조적 삶>이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스며들기를 간절히 소망할 뿐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