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생의 철학자인 짐멜(Simmel)은 <돈의 철학>이란 저서에서 특히 정확성, 정밀성, 명확성 외에 삶의 다른 곳에서도 영향을 미치며 사람이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수단이나 쉽게 얻을 수 없음을 지적함에서 돈이 향후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대한 관심을 제기한다.
인간은 경제적인 욕망을 과시하고 자신의 존재를 외부로 드러내고자 하나 생의 형상체로 태어나 소멸로서 사라지는 유한적인 초로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한 천민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돈의 노예>나 괴물이 되어서는 아니 되리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인간은 지나친 물신화(fetishism)와 물질주의를 숭상화 해 왔기에 이제는 황폐한 삶에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가상사회( metavers)와 연계된 현대 사회에서 건전하고 부유한 삶을 극대화할 수 있는 철학적 의미를 지닌 ‘돈’에 특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돈’의 순기능으론 소유욕이 충족되면 행복감을 느끼는 등 선택의 폭이 넓혀지어 공간에 민감한 인간은 보다 넓은 공간에서 살려고 하는 심리적인 영향 등 치유 기능은 크나, 역기능으론 극단적인 행위는 범죄에 빠지어 돈의 노예가 되며 지나친 탐닉으로써 인색한 수전노나 범죄자가 되기도 한다.
뭐니 뭐니 해도 돈에 대한 믿음의 제일은 모두의 삶을 위해 이롭고 널리 쓰이는 수단일 뿐, 돈 버는 것만의 절대 탐심은 부자가 되려고 또는 해달라고 맹목적으로 비는 건 걸인과 구걸(求乞)의 행위일 뿐일 터, 공익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자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라는 <선언>의 전제로서 ‘구걸’과 ‘서원 및 기도’와는 큰 차이가 있다.
헌데 <돈=지폐>의 부분이 전자 화폐로 대체되는 등, 4차 산업과 함께 비트코인이 등장하면서 가상화폐가 거세어지는 사회에선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축재(蓄財)와 이재(理財)’에 대한 역동적인 충격을 경험케 한 돈의 효능에 대해 깊은 성찰을 다시 해본다.
얼마 전 보도에 의하면 돈의 가치와 본질이 극대화 된 <돈>에 내재된 철학적 의미를 몸소 실행한 익명의 50대 독지가는 300억 원의 전 재산을 카이스트에 기부하면서 명리를 포기 한 ‘나의 기부가 ’젊음‘이라는 카이스트 대의 강한 무기와 결합해 국가와 전 인류 사회에 이바지되는 성과를 창출하는 초석이 됐으면 한다는 보도에 종교적 성스러움을 느끼었다.
사실 <돈>은 삶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기에 그 중요성에 대해 친밀하게 접근한 베버의 논리는 직업으로서의 합법적 이윤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정태성에 있다고 정의함에서 자연스럽게 돈의 바른 사용처를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물론 <돈>의 진화 과정의 유기적 관계에서 아담 스미스는 삶을 위해 인간이 물품을 교환하는 결과물이라 했음에서 옳게 써야할 돈이 이재(理財) 도구로서의 자유(균형과 분배) 행위가 아닌 단지 맹목적인 축재(蓄財)라 한다면 그건 오직 탐욕의 오염물로서 공동체의 삶에 역행하는 수단일 터에서이다.
그러함에서도 사회는 오직 현실을 넘어선 ‘노블리스 오블리즈’의 삶만을 강요함은 아닐 터이며, 다만 개인차에 따른 가족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 이상의 돈이 쌓이는 것에 대한 일말의 사회적 책임도 없이 작은 기부와 선행 및 봉사심도 저버린 지도 층 인사 그 들이 최소한의 ‘돈’의 용처에 대한 책임과 합리성에 반하는 통속적인 틀에서 벗어남이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간혹 흙수저로 태어남을 앞세우며 성공한 공직자로서 청빈(淸貧)을 표방한 그들이 한낱 월급쟁인 그들 재산이 사업가로 활동하는 고액 납세자들 보다 더 백만장자로 정직을 자랑한 그들이 좋은 대접을 받고 영화를 누림은 진정 지성과 겸양을 갖춘 공익적 목표에 이바지한 공인으로 찬양되는 그 순간에 느낀 자괴감들이 머리에 돔을 어찌하랴.
아! 아니,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는 ‘부(富)와 명예’를 거머쥔 뻔뻔함과 타인 배려를 못하는 사익적 처신에 속은 이젠 민주 자본주의의 위기(빈부의 격차)마저를 우려케 됨에서 모두의 소망은 명리를 떠나 여유(부와 무소유)를 나누고 실천하며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삶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와 행복감을 찾는 아니 ‘남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인사’ 그들만이 비로소 사회의 바른 지도자로서 가상타 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