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공장경비 알바 중학생>
야미도는 김해김씨 집성촌이다.
우리 집안에서 한학자를 육지에서 모셔와, 주로 집안 여섯 살 이상인 남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문을 배우게 했다.
나는 어느 날 선생님 앞에서 졸다가 장딴지 회초리를 맞았다.
그 상처는 종아리에 지금도 자국이 남아있다. 그 뒤로는 졸음이 없어질 정도였다.
8.15 해방이 되면서 육지에서 초등교육을 가르칠 선생님을 초빙하여 정상적인 초등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나도 여덟 살이 되면서 1학년에 입학하여 6년의 초등학교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학교시설은 대형 한옥이지만 교실은 넓은 편으로 1-6학년까지 학생 수가 적어 한방에서 공부를 했다.
교실은 시멘트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처음에는 책상도 없이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 바닥에 앉는 책상을 구입해 책상에서 공부를 했다.
열악한 교육환경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는 향학열이 대단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총각선생이다. 선생님은 시간이 날 때면 저녁노을의 해변가를 거닐 기도 하며 당시에 유행하던 소설책 스토리를 들려주는 여유도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선생님이 아닌가 싶다.
선생님은 하숙집 따님과 결혼하여 한 쌍의 부부로 탄생하는 행운을 안았다. 섬마을 총각선생과 섬 처녀가 결혼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의 섬 시대상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6학년 2학기 10월 어머니가 부락 갯바위에서 익사를 하신 것이다. 13세의 나는 어머니를 그리며 어린동생들을 부등켜 안고 목 놓아 울며 겪은 동심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특히 세 살 된 막내 남동생이 엄마를 부르며 젖 달라고 울부짖으며 보채는 모습은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 없는 세상이 됐지만, 날씨가 좋은날에는 혼자서 동네 큰 산에 올라가 뭍을 그리며 이제 어떤 사람이 돼야할 지에 대한 생각을 하며 커다란 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신학기를 앞두고 군산에 중학교를 보내달라고 아버지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사람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말 새끼는 제주로 보내야 한다”하시며 군산 가서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 말씀은 지금도 귀에 젖어있다.
군산북중학교에 입학하여 당당한 중학생이 됐다. 입학식에 당시 세루양복에 학생화 구두를 신고 입학식에 참석했다.
당시에는 아버지께서 안강망어선을 갖고 있어 어렵지 않은 경제생활로 하숙을 했다.
그러다 3년이 채 안돼서 가산이 탕진되어 군산 중앙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한 동생과 함께 자취생활을 하다가 그것도 오갈 데가 없어졌다.
내 고통의 운명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동생은 서울로 가고 나는 지인의 알선으로 군산여고 옆 주사기공장 야간 경비원으로 취직이 됐다.
지금으로 보면 야간 알바인 것이다. 낮에는 학교에 다녀오고 저녁에는 공장 경비를 했다.
잠자리는 일본식 기와집에 창문은 하나도 없고 다다미 12장 크기의 방에서 당시 미군담요 한 장에 백열등 하나가 전부이다.
그러다보니 고생은 말 할 수가 없다. 어떤 수난에도 공부는 해야겠다는 의지는 굽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