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섬 소년의 꿈, 서울로 법과대학 진학>
아르바이트 시작은 중학교 2학년 2학기부터였다.
추운겨울 공장을 몇 번씩 둘러보면서 담요 한 장 둘러쓰고 공부를 해야 하는 어린마음은 오직 공부해서 성공하는 길 뿐이라는 각오였다.
나는 이때부터 나의 자립정신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주경야독을 할 수 있는 군산중앙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역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오직 대학은 서울로 가지만 법과대학으로 진학하여 판검사가 되겠다는 꿈을 새기면서 시간을 금쪽 같이 여기며 공부를 했다.
때마침 중학교 시절 누나라 불렀던 하숙집 따님이 군산에서 자영업을 하는 상점 점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
착한 점원이 필요한터에 내 사정을 알고는 무조건 오라는 요청으로 한 가족이 되어 점포 일을 도와주면서 공부를 할 수 있어 나에게는 큰 은인을 만난 것이다.
야간학교에 다녀오면 저녁 늦은 시간인데도 손수 저녁밥상을 차려주는 정성을 쏟아 주었다.
주인 부부는 독실한 교회신자라서 일요일에는 휴일이다.
나는 가끔 군산월명공원을 찾았다. 금강도 바라보지만 멀리 아른거리는 고군산군도도 보인다.
군산에서 첫 번째 섬인 내 고향 야미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야미도 큰 산에 올라간다. 산에 올라가면 맑은 날에는 군산비행장일대와 김제, 부안 높고 낮은 산들이 눈앞에 와있는 느낌이다.
특히 썰물인 간조시기에는 비행장 앞과 만경강 줄기 주변은 광활한 모래밭이다.
그럴 때면 저 모래밭을 육지로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에 젖어든다.
중학교 여름방학 때 아버지와 함께 안강망 우리 배에 육젓을 가득 싣고 만경강을 따라 김제 진봉을 지나 청하면 어업조합을 가게 된다.
때마침 바람이 없어 밀물시간 한 번에 못가고 다음 밀물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만경강 중간지점쯤인 진봉면 망해사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대에 만경강 주변일대는 드넓은 모래밭과 수심이 1m도 안 되는 상황을 보아왔다.
야미도 큰 산에 올라가 바라본 비행장 앞이나 만경강 주변이나 이토록 수심이 낮은 곳이면 얼마든지 육지로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물론, 하나의 희망이요. 허상에 불과한 일이라 해도 마음은 계속되었다.
가슴에 꿈처럼 새겨둔 것이다. 이 꿈은 내가 전북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1978년 전국에서 최초로 서해안에 대단위 간척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평소 가슴에 새겨둔 『육지로 만들면 얼마나 좋을 까』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국토확장과 식량안보차원에서 대단위간척사업의 필요성을 전북일보를 통해 지상 공론화 한 것이다.
이 꿈의 사업이 오늘의 새만금 사업이다. (사업내용은 추후별도 설명할 것임)
주경야독의 결실은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법률학과에 진학을 하게 된다.
중고등학교 생활의 질곡을 넘어 서울의 고된 고학생활이 시작된다.
자취방에서의 초등학생 교습, 가정교사, 연탄배달, 주택지 성토작업, 호떡장사, 배추장사, 서울 답십리 버스종점에서 학교까지 한 시간을 걸어 다녔다.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답십리에서 청량리, 청량리에서 회기동까지 가야한다.
시내버스요금을 아끼기 위해서다. 이러한 삶의 역경은 오직 판검사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대학생활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