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한·일 협상 반대 시위주도
모진 설움 달래면서 학교생활을 이어오지만 1964년 한일협상 굴욕외교 반대시위에 앞장섰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선 한일협상 반대시위는 경희대학교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가리켜 6.3사태로 일컬어지고 있다.
나는 당시 경희대학교 학생 시위주동자로 몰려 아침 9시 등교하면서 이근칠 법대 학장실에 불려가 2시간 동안 데모준비를 포기하라는 강력한 요청 끝에 수락을 하고 풀려나왔다.
그러나 그는 감금 상태였다.
본교 교시탑을 중심으로 기다리던 학생 4,000여 명의 환호 속에 ‘굴욕외교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회기동 학교를 벗어나 신설동 로타리까지 진출했다.
시위진압에 나선 경찰과 대치하는 살벌한 상황에서 체류탄 세례로 산산이 헤어지면서 도주하기에 바빴다.
나는 도로변 어느 집 지붕으로 도망치다가 스레트지붕에서 한발이 빠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날 밤 9시경 시위대가 청와대 외곽에 도달하자 정부는 서울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군은 시위대 학생들을 진압하고 6월 4일부터는 모든 언론이 정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며 집회는 불허하고 야간통행금지령이 발표되었다.
계엄령이 발표된 4일 각 대학 시위 주동 학생대표들은 고려대 총 학생회관에서 모이기로 하여 계엄군을 피해 모임에 참석하여 학원방위대를 결성했다.
그러나 계엄군에 쫓겨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당시 의혈청년의 정신은 지금도 살아있어 때로는 시시비비와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려는 성품이다
6월 3일 학교 교정에서 시위학생들을 취재하러 나온 동아일보 기자에게 시위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순간 기자가 되면 사회를 보는 관점이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일협상은 1964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한일회담 내용 중 일본에게 우리해역의 어장(漁場)을 다수 양보하는 내용이 포함돼있어 이에 어민들은 물론, 정치적문제로 발전하면서 한일회담 반대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3월에 이르면서 정부는 한일회담의 진행이 재확인되면서 전국적으로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하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이면에는 1962년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과 일본 오하라 마사요시 총리 사이에 한일회담 기초가 되는 비밀메모 교환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6.3사태 개요)
당시 한일협상 내용에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등은 구체적 사실에 대해 우리 정부와 일본 정부의 현저한 견해차로 지금도 한․일간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저녁에는 과외수업을 받으러 오는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다.
학교에 졸업논문 제출, 졸업 기념사진 등 졸업준비를 마쳤지만 2학기 등록금을 못 내고 있는 상황에서 11월 말경에 자취방에서 각혈을 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 옮겨져 두 달 동안 입원치료를 받은 뒤 퇴원을 한다.
그러나 쇠약한 건강은 나로 하여금 학업도 생활도 꿈도 저버려지는 극한적인 곤경을 겪어야만 했다. 삶의 질곡을 헤매면서 판검사가 되겠다며 각혈을 하면서까지 공부를 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절간에서 시험 준비도 했고 고시 시험도 두 번이나 응시를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경제력을 절감한 나는 고시준비를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나설 각오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