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김판술 선생과의 인연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판검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사)한국국책연구소 기관지 편집기자로 일자리를 갖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중학교 사제지간인 고자봉 선생으로부터 군산출신 김판술 선생을 찾아뵙도록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민주당 정부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하신 김판술 선생께서 군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를 준비 중이시니 현 직장은 그만두고 꼭 도와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고 선생은 보사부 장관실 정책보좌관을 지내신 분으로 장관실에서 몇 번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꼭 찾아봬야 한다고 하신다. 구체적 사실은 알 수 없으나 일단은 뵙도록 하기로 했다.
약속장소인 당시 종로 화신백화점 다방에서 김판술 선생을 처음 만나 뵀다.
선생께서는 무조건 군산에 내려가 당과는 상관없이 비선조직을 맡으라는 것이다. 당시 당은 신민당이다.
김판술 선생과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자리에서 처음 보는 양소영 씨(고 양일동 통일당 당수 동생)를 소개하며 함께 군산으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서울의 생활을 대충정리하고 그날 군산으로 내려가 숙소를 정해놓고 조직에 들어갔다.
특별한 경험은 없지만 학교친구와 지인들을 동원해 김판술 국회의원 후보예정자를 돕기로 하자고 매달렸다.
1967년 6월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한 조직이다. 나는 군산시내 중앙로에 소재한 여관을 정해놓고 새벽이면 나가고 밤늦게 돌아오는 나날을 보냈다.
여관 주인은 젊은 청년이 새벽에 나가고 밤늦게 온다는 이상한 청년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내 뒤에는 형사가 미행을 하기 시작했다. 미행의 낌새를 알아차린 나는 주도면밀한 행동으로 조직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이를 확인한 형사는 미행을 멈추고 직접 만나기를 요청해와 바로 상면을 했다. “김판술 선생을 위해 수고 많으시다”며 “가끔 만납시다”하는 제안을 한다.
하마터면 간첩으로 몰릴 뻔 했다. 당시 선거구는 군산시와 옥구군으로 1명을 선출하도록 돼있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농촌지역인 옥구군을 집중적으로 점조직을 하기로 했다.
드디어는 정식 후보가 되어 본격적인 선거에 들어갔다.
옥구군은 도서지역을 무시할 수가 없다. 선박 하나를 준비하여 옥구군 관내 섬 지역모두를 다녔다. 2∼3일에 한 번씩 김 선생께 조직현황보고를 드렸다. 옥구군과 함께 군산시까지도 조직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시다.
이러는 과정에서 백효기 여사(작고 전북도의원)를 만나게 된다. 백 여사는 시내 누구누구를 만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민주주의 꽃이 피어야 한다는 말씀을 꼭 해요“라는 당부를 하신다.
백 여사는 명산동에서 백약국을 운영하시는 약사이시다. 전라북도의회 홍일점으로 당찬 의정활동의 기록을 남긴 여성 첫 도의원이다.
어느 정도 비선의 기본보직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1967년 6월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날이 닥쳐왔다. 이른 새벽부터 투표장소를 돌아다니면서 유권자들의 동정을 살폈다.
5.16 군사쿠데타로 탄생한 민주공화당과의 대결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상대는 민주공화당 소속 차형근 변호사다.
서슬 퍼런 집권여당의 후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