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여걸 백효기 여사 2
전북도의원 시절 익산 관내 어느 소류지의 제방공사가 부실하게 축조되었다는 제보를 접했을 때, 백 의원은 현지답사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부실공사의 원인을 기어코 파헤칠 정도로 여성으로서의 다부진 일면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백 여사의 그 기질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6.8총선 후 부정선거 규탄대회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에게 마이크를 건네준 그는 나의 혈기를 눈여겨보면서 “자네는 앞으로 꼭 정치를 하라”고 못 박아 주었던 그 한마디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경찰의 군산 신민당 당사 난입사건이 거창한 정치적 파문으로 비화되었을 때 나는 백 여사와 함께 물불을 가릴 사이도 없이 정의의 갈증을 풀기 위해 뛰어다녔다.
나는 서울에 있으면서 군산에 내려오는 날이면 이틀에 한 번씩은 꼭 여사를 만났다.
한번은 나의 고향인 야미도를 갔을 때 섬사람들의 생활상을 보고 군산에서 수로 백리길을 여객선에 의지하는 불편함이나 외딴 섬 생활이 얼마나 고달픈가 하는 모습에 몹시 가슴 아파해했다.
1박2일 계산으로 야미도를 찾았으나 태풍으로 3박4일이 걸렸다. 이러한 실상을 본 백 여사는 나에게 “이런 모습을 보고도 뜻있는 사람들이 이끌 수 없다면 죄악”이라면서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중매까지 서겠다고 나를 불러댔지만 나는 당시 교제(지금의 아내)중인 여성이 있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야미도에 간 것은 나의 집안사정과 내력을 알아보기 위한 것임)
사실은 섬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루는 약국에 오라고 하여 오전에 들렀더니 참한 여성이 있으니 선을 보러가자는 것이다.
실토를 했다. 교제 중인 사람이 있다고. 낙담을 하시면서 “꼭 성사를 이루도록 하려고 했는데”하며 못내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신다.
나는 다른 여성과 선을 본적이 없다. 그때 선이라도 보았더라면 경험 하나를 살 수 있었을 테지만 양심을 속일 수는 없었다.
병상의 백 여사는 파리했다. 그러면서도 깔끔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방 안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문병 간 나의 손을 꼭 쥐었다.
손에 힘은 없었지만 따뜻했다. 그 당당했던 힘이 어디로 빠져 나갔는지 무상을 실감했다.
“나는 오래 못 살 것 같다. 자네는 열심히 세상 살아가면서 부디 좋은 일을 많이 하게”하며 말끝을 맺는다. 그 우렁찼던 목소리가 어디가고 가냘프게 떨렸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슨 말로 이 세상의 고운 인연을 설명해야 할지 목이 아파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겨우 용기를 내시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뒤돌아섰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데모 때면 어깨띠를 두르고 항상 앞장섰던 무서운 기개와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온정의 손길이 눈에 선하다.
양장차림으로 백 약국에 앉아 있으면서도 늘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시던 모습은 이제 영원히 찾아볼 수가 없다.
여성 선각자로서 항상 정의감에 불탔던 그가 봉황공원묘지에 묻힐 때 옛날의 야당 동지들과 은공을 잊지 못한 많은 주위 사람들은 숙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불의를 보고도 눈길을 돌려서는 안 된다”면서 정의롭게 강조하시던 백 여사는 지금 저승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백장미 한 송이를 사고 싶다. 묘지에 가는 날.
백효기 여사는 서울 출신으로 동덕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유학에서 소화약전을 나와 약사면허를 취득하고 서울에서 약국을 개업했다.
그러나 6.25사변으로 군산에 피난 와서 명산동에 백 약국을 개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