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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규 시대상의 시각

제14회 소금역할 다짐, 신문기자가 되다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23-04-14 09:54:24 2023.04.14 09:54:24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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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소금역할 다짐, 신문기자가 되다

 

6. 8선거 실패로 김판술 선생을 1년 가깝게 모신 나는 이제 내 갈길을 찾아야 했다.


당초 계획대로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었다면 아마도 김판술 선생의 비서가 되어 정치를 배웠을 것이다. 정치권에 진입한다는 꿈이 사라진 것이다. 


때마침 호남일보에서 기자모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를 하게 된다.


1968년 5월이다. 다행스럽게 합격통지를 받고 신문기자가 되어 출근을 한다. 


부서는 사회부. 3개월여 동안 ‘신문기자로서의 사명과 사회의 소금역할을 해야 한다‘는 각오로 열심히 뛰었다. 


역시 당초 생각했던 대로 사회를 배워갖고 정치를 하는 게 순서가 아니겠느냐는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전북일보에서 경력기자를 공모한다는 사고가 나와 응모를 했다. 무조건 지원을 한 것이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1968년 8월1일자로 전북일보 기자 발령을 받고 군산분실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다른 신문보다 좋은 기사 발굴로 군산소식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본 선배들은 시기를 할 정도였다. 당시 군산분실에는 이계동, 문화봉, 김병남 세 선배가 있었다.(모두 작고) 

나는 주로 사건을 담당하면서 일반 기획기사를 많이 다루었다. 사건기자는 시간에 상관없이 경찰서, 해양경찰서 검찰, 법원에서 거의 시간을 보내는 무대이다.

 

군산관내에서 발생한 간첩사건 하나를 소개한다. 1969년 8월 초 어느 토요일 오후 군산해양경찰서가 비상이 걸렸다.


내용인 즉, 군산시 옥도면 개야도에 간첩선이 나타나 고향 사람을 납치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해경 서장은 경비정 출동인데 동승하겠느냐고 하여 본사 편집국 사회부장에게 사건을 보고하면서 동승여부를 물었으나 안전문제가 있는 만큼 가지마라는 것이다.

 

이날 해가 저물어 칠흑 같은 밤에 우리 군 당국은 달아난 간첩선을 발견하기위해 조명탄을 엄청 쏘아 올려 결국 간첩선을 발견하고 격침을 시켰다. 


이 배는 목선으로 가라앉지 않아 우리 해경정이 군산부두로 인양했다. 간첩은 6명으로 기억된다. 이들은 모두 숨진 채 발견됐으며 군산 내항으로 예인된 간첩선은 부두위로 올려놓았다.

 

독일제 카메라로 예인되는 과정 등 수백장 사진을 촬영하여 다음날 아침에 현상을 맡겼으나 단 한 컷도 없이 까만 필름이다. 


머리가 돌 지경이다. 허둥대고 부두에 예인된 간첩선만 새로 촬영하여 필름 통째로 전주 본사로 택시편에 보냈다. 


밤새 고생하면서 촬영한 것보다 훨씬 좋게 나왔다. 이날 신문은 1면 머리기사 사회면 머리기사 등 김철규 특파원 기사로 지면장식을 했다. 얼마나 흐뭇한지 몰랐으며 선배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이 간첩선에는 사건발생 몇 년 전에 어로 작업 중 납북된 개야도 출신 한명이 간첩일행과 함께 고향을 찾아 집안 식구 누구라도 납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는 초등학교 5학년 여자조카만 있었다. 


이들은 목적에 실패하자 도주하려 했지만 때마침 배가 썰물에 걸려 몇 시간을 머물렀고, 이후 밀물이 들어오면서 떠나려는 순간 조카의 신고로 사건이 육, 해, 공군, 해경의 합동작전으로 격침을 시킨 사건이다.

 

그 후 어린이의 간첩조기신고와 관련한 내용은 전국적으로 신고요령 등에 대한 반공교육 자료로 쓰이기도 했다. 간첩선은 군산에서 전주로 옮겨 국민들에게 볼 수 있도록 했다. 사건기자란 밤과 낮이 없는 출입처다.


1971년 전주 본사. 편집국으로 발령을 받고 역시 사회부 사건담당 부서출입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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