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호 불의를 보고 외면하지 말자
언론계에 투신한 이유는 정치와 무관치 않았다. 정치를 하려면 사회를 먼저 배우면서 국민의 생활상을 지켜본 경험을 토대로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으로 신문기자를 희망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생활이 곧 정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기자생활보다 정치입문이 먼저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김판술 선생을 모시고 1967년 6.8선거를 치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정치판에 뛰어들었고 정치란 무엇인가를 희미하나마 알게 됨에 따라 앞으로 걸어가야 할 앞날을 점쳐본 것이다.
또 하나의 동기는 대학시절 굴욕적인 한·일 협정반대 데모에 앞장서면서 취재기자들과 만나 ‘치욕적인 굴욕적 불평등 협정을 막아야 한다’고 데모의 이유를 밝히는 과정을 취재하는 모습을 보고 기자와 정치는 필연의 관계임을 느낀 것이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6.8부정선거의 규탄과 한일협정 반대시위 등으로 가슴속에 타고 있던 불길의 기세는 매우 저돌적이었다. 이러한 나의 심지는 앞으로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지가 심어진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신문기자가 되려는 의지로 ‘불의를 보고 외면하지 말자’, ‘약한 자의 편에 서자’, ‘그늘진 곳을 찾아가자’ 라는 세 가지 신념을 갖고 기자생활을 하게 된다.
주로 사회부에서 일을 하다 보니 타 부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사회부에서 사회부 차장, 사회부장을 역임하고 편집부국장, 논설위원을 끝으로 전북일보를 퇴직한다.
1991년 30년 만에 지방자치제가 부활됨에 따라 1990년 말 퇴직을 하고 지방정치에 뛰어든다.
현직에 있으면서는 전북 도내에서 발생하는 큰 사건 사고는 반드시 현장취재를 하게 된다.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현장중심 취재를 했다.
보기 흉한 시체도 수없이 보아왔고 남원 열차의 처참한 사고, 고창 조개잡이 소형어선 침몰로 인한 집단 익사사고, 군산 세대제지 대형 화재사건 등 헤아릴 수가 없다. 울음바다가 된 유족들 속에 들어가 사상자 사진을 구하기 위해 앨범을 찾는 등 취재과정에서 빚어지는 현상은 지켜본 기자가 아니면 못 보는 현장이다. 특히 인명피살 사건을 밤샘하면서 취재가 끝나면 비위가 상해 술을 안 마실 수 없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결코 신문기자란 쉬운 직업이 아님을 많은 되뇜 속에서 사회현실을 배워왔다. 냉엄한 현실 판단 감각도 익혀왔다.
1980년에는 한국기자협회 전북지부장에 당선되어 언론인들의 권익보장과 편집권독립 등 활동을 하게 된다.
이즈음 광주 5.18사태를 맞는다. 5.18사태로 인해 한국기자협회 본부 집행부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군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구속되거나 피신을 함에 따라 협회의 존폐문제가 대두된다.
기자협회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에 일부 도 지부장들의 요구로 5인 공동대표제를 채택하고 호남, 영남, 경인, 방송, 중앙지에서 각 1명씩 5명으로 했다.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닌 5명이 공동책임을 짓도록 하되 지역에서 1명씩을 선임 추천토록 했다. 나는 호남대표로 선출되었으며 1980년 1년 동안 한국기자협회를 공백 없이 정상운영을 했다.
5인 공동대표위원이기도 하지만 5.18 사태 현지취재를 해야만 했다. 비장한 각오로 동양고속 전주사무소 소속 지도차량으로 5월 23일 광주에 진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