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5.18 광주사태 현장 취재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시해를 당하자 전두환은 12.12사태로 권력을 잡으면서 1980년 5.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시작한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군사독재와 통치를 반대하며 계엄령 철폐, 민주정치 지도자 석방 등을 외치며 전남도청 앞에서 대대적인 규탄 대회를 갖고 민주화운동을 벌인다.
전두환은 계엄군을 투입, 학생과 시민을 대상으로 무차별 총을 쏘았다. 이러한 사태는 외부와의 통신두절로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특수전화를 통해 제한적으로만 상황파악을 하는 정도였다.
전북 사건을 담당하는 나로서는 외부차량은 광주진입이 불가능 하여 그냥 넘길 수 없다는 판단아래, 5월 23일 평소 잘 알고 지내는 동양고속 강귀동 전주사업소장에게 너무도 궁금하니 함께 광주에 가자고 부탁하여 고속도로 지도차량으로 갔으면 한다고 했다.
흔쾌히 가자고 하여 남원으로 담양을 거쳐 광주 진입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광주외곽을 지키는 계엄군에 의해 3번을 검문 당했으나 고속버스 지도원이라는 변명으로 전남도청까지 무난히 도착했다. 나는 도청 기자실을 먼저 찾았다.
전주에서 간 선배기자를 만났다. 사태의 내용을 설명 들으면서 몸서리가 처진다. 무엇보다 현장을 목격하고 싶어 시신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선배는 몹시 위험하니 도청 앞을 함부로 다니다간 큰일 난다고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면서 도청 벽을 따라 경찰 상무관을 먼저 가보라고 한다.
문이 열린 상무관을 바라보는 참상의 순간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너무도 넓은 상무관 바닥에 임시 안치한 시신들이 즐비하게 꽉 메우고 있다.
임시 준비한 목관에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태극기로 관을 덮었고 미확인자는 얼굴만 보이도록 해 놓았다. 관이 모자라 바닥에 횐 포로 시신을 감싸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젊은 피들이 처참한 총살을 당한 현장은 너무도 참극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시울이 적셔지기도 했다. 현장에서 우리 국군에 의해 총살을 당한 시신을 많이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청천벽력 같은 마음이 메워지는 감정이다.
이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는 암담함은 물론이지만,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문제로 대두된다.
다시 도청 기자실에 돌아와서 각 언론사 기자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며 보다 상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임신부가 총살을 당했는가 하면 여대생이 총검으로 유방을 도려내는 장면도 있었다고 했으나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는 설명이다.
점심도 못 먹은 터라 배가 고파 도청을 빠져나와 차에서 기다리는 강 소장과 함께 금남로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 식당을 찾았다.
문 닫은 식당이 많았다. 겨우 한집을 찾아 식사를 하면서 여사장에게 당시 상황을 물었더니 주저하는 모습이다.
신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전주에서 온 전북일보 기자라며 신원을 밝히자 그때서야 말문을 연다.
“말도 마세요, 몸서리가 처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며 “완전무장을 한 군인이 앞에 다가오면 오금을 못 펴고 고개도 못 들었다”고 한다. “도대체 식당 바깥을 나가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총성이 들릴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 꼴”이라며 “도청 앞 광장은 얼씬도 못하니까 몸조심 하세요”하고 당부를 한다. 가까스로 숙소하나를 구해 광주에서 1박을 한다. 광주 사정을 좀 더 알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