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3월 21일, 미수교국인 중공해군이 우리나라 서해 영해를 침범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공 인민해방군 해군소속 어뢰정 한 척이 우리 영해로 들어옴에 따라 중공해군이 추격하다가 우리 영해를 침범하게 된다. 우리해군과 격전이 벌어진 것은 아니나 비상이 걸린 것이다.(당시 미수교국으로 중공으로 국호사용) 관계 기관에서 극비에 진행되는 사건을 3월 23일 아침 7시 30분 경찰 담당 기자로부터 보고를 받음과 동시에 편집국장에게 보고한 뒤 중대한 국제관계사건으로 판단, 직접 긴급 취재에 나선다. 전북 도내는 물론, 전국 어느 언론사도 알지를 못하고 전북일보 기자만이 유일하게 취재에 나선 것이다.
사건발생 3일 만에 군산 외항 부두에 어뢰정을 예인, 도착할 때까지도 취재기자는 전북일보 김철규 사회부장, 사진부 강호일 기자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중공 해군정장 모습을 전북일보에서 처음 보도를 했다. 강호일 기자는 사진부문 특종상을 받았다.
사건의 전말을 보면 중공 해군소속 어뢰정 3213호(64톤)는 3월21일 오전 6시30분 중공해군 북함대 소속 PS 6형 어뢰정 6척이 중공 산동성 칭따오(청도)기지를 떠나 공해상에서 약 1시간 동안 항해훈련을 마치고 7시 30분께 기지로 귀항 중이다. 칭따오 기지 동쪽 20마일 해상에 이르러 문제의 어뢰정 승조원 19명 중 상사에 불만을 품은 통신사 두신리(杜新利.20), 항해사 왕중영(王中榮.19) 2명이 상관으로부터 이날도 심한욕설을 듣게 되자 이에 격분, AK 소총 2정을 탈취, 지대 부 지도위원 손세충(孫世忠.40) 등 6명을 현장에서 사살하고 기관장과 부정장 2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해상반란을 일으킨 뒤 편대를 이탈한다.
난동을 부린 수병 2명은 키를 잡고 기지로 돌아가면 사살당하리라는 판단아래 한반도방향으로 9시간을 항진하다가 흑산도 근해에서 연료가 소진되어 표류하게 된다. 표류 6시간 30분 만에 귀항중인 우리어선 제6어성호(선장․강동이․51․군산수협 소속)에 의해 구조된다. 이들 승조원들은 생명의 은인이라며 감사함을 멈추지 않았다고 당시를 들려준다.
강 선장은 구조하면서부터 어뢰정을 예인하기 시작, 9시간여에 걸쳐 부안군 위도면 하왕등도 50m해상까지 왔을 때는 밤 9시경이다. 강 선장은 대흑산도 근해에서 중공어뢰정을 구조, 예인해온 사실을 경찰관 파출소에 신고를 하게 된다. 정부는 긴급 대책회의를 숙의하는 등 한밤중 비상벨이 울린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관계부처 관계자들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극비에 우리 군산 해경정이 출동, 하왕등도에 정박 중인 어뢰정 부상자 2명과 관리자 1명 등 3명을 급거 군산의료원에서 응급치료를 받도록 했다. 어뢰정이 하왕등도에 예인돼온 시간부터 10시간 30분이 지난 23일 아침 7시30분에야 정보를 입수하여 취재가 시작된 것이다. 첩보전을 방불케 한 사건진행이다. 철통같은 보안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정부당국의 기사보류(엠바고)요청으로 보도를 못했다. 다음날에는 호외를 발행했다. 취재당시 전북일보 단독취재인데 보도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국제관계사건인지라 엠바고를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승조원들은 군산호텔(현 아본 호텔)에 일시 수용한 상태다. 사회부장이 사건을 마무리 할 때까지 직접 취재토록 하라는 회사 방침에 따라 군산호텔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