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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규 시대상의 시각

제26회 새만금사업의 태동3<김대중-노태우 청와대 담판으로 착공>

군산신문(1004gunsan@naver.com)2023-07-07 10:01:23 2023.07.07 10:01:23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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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새만금사업의 태동3<김대중-노태우 청와대 담판으로 착공>

 

1980년대 초부터 시작한 대단위 간척사업은 지지부진 이렇다 할 사업진행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과정에서 세월은 1980년대 말에 이르렀다. 


당시 1988년 2월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전북 서해안에 대단위 간척사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지지부진 뭐 한 가지 사업도 하지 않고 사실상 방관상태에 있는 실정이다. 이 사이 한국농어촌공사는 옥구 앞 간척사업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이는 대단위간척사업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근본 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1990년도 때마침 민주당 김대중 총재와 노태우 대통령 영수회담이 확정되어 있었다. 


평소 대단위 간척사업의 필요성을 갖고 있던 부안 출신 이희천 국회의원(고인)과 당시 김원기 사무총장(2004년 제17대 국회의장)은 김대중 총재에게 “정부에서도 적극 검토하고 있으나 쉽지 않다. 


전북의 현안인 만큼 노태우 대통령 후보시절 공약인 서해안 대단위 간척사업을 단일안건으로 노 대통령과 담판을 하자”고 협의해 의견을 모아 당론으로 확정했다. 


청와대 회담에서 김대중 총재는 “공약은 지켜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하겠다”는 확답을 함에 따라 성공을 한 것이다.(이희천 의원과 김원기 국회의장의 담판과정 설명)


김대중(2013년 15대 대통령)당시 총재와 노태우 대통령의 담판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새만금 사업은 요원했을 것이다. 


전북일보 김철규 기자의 국책기사는 국책사업으로 발전하여 김원기 국회의장, 이희천 국회의원 김대중 대통령(고인), 노태우 대통령(고인)에 의해 이루어진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사업으로 평가하고 싶다.


이로 인해 사업 주관은 한국농어촌공사로 농림부에서 토지형질변경 관련예산 200억원으로 일단 1991년 11월 28일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서 천지개벽을 하는 기공식을 거행했다. 사업과정에서 사업 명칭을 ‘새만금’으로 결정, 시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새만금 사업의 효시이다.

 

이러는 과정에서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해산된 지방의회가 30년 만에 부활,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된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평소 정치에 꿈을 키워온 나는 지방의회(도의원)진출을 목표로 젊음을 바친 전북일보를 1990년 12월 논설위원을 끝으로 회사를 떠난다.


일단은 언론에서 익힌 사회의 각 분야를 터득한 만큼 지방정치에 헌신하자는 결심이다. 


지방의회와 단체장을 마치고 나면 중앙정치 아니면 도지사 출마도 가능하다는 판단아래 진입은 그리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고향 군산 쪽인 옥구군 제1선거구로 도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이 됨과 동시, 도의회 의장에까지 당선의 영광으로 정치 데뷔의 화려함을 안았다. 정치에 첫발을 내 디딘 것이다.

 

전북도의회 의장이 된 나는 1991년 11월 28일 세계 최장 33.9km의 제방 기공식에 최용복 도지사와 함께 의장자격으로 전북 주민을 대표하여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테이프커팅을 했다.


그러나 사업 진행과정에서 환경단체 등의 반대로 각고의 진통을 겪으면서 2010년 4월 27일 20년 만에 드디어 준공을 보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러나 새만금 뿌리 정리의 미흡함에 대해 나는 2021년 11월 29일자 전북일보에 ‘새만금 30년 뿌리 제대로 알자’라는 제목의 칼럼을 내보냈다. 다음호에 전문 게재.(26회와 일부 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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