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새만금사업의 태동4 <새만금 사업 뿌리를 제대로 알자>
역사는 정확성이 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에 근거하여 왜곡됨이 없어야 한다.
1991년 11월 28일은 오늘의 새만금사업인 ‘새만금 간척종합개발’기공식을 한 날이다.
한반도에 새 역사를 쓰는 새만금사업은 30년을 맞이했지만 과연 누구의 제안과 사업시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과연 옳은가 하는 점에 안타까움이 있어 이를 밝혀주려 하는 것이다.
한국농어촌공사는 ‘새만금 뿌리’라는 책자에서 1986년 1월 서해안 간척사업 장기개발사업 수립, 1986년 3~12월 새만금지구 계획구상 및 답사실시, 1987년 10월 17일 새만금지구 타당성 조사내용, 대통령 보고 등으로 되어있으며,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91년 11월 28일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고인),농림부 장관과 정부 관련인사, 전북에서는 최용복 도지사, 김철규 전북도의회 의장, 주민대표 등이 참석한 자리로 천지개벽을 이루는 현장이었다.
필자는 전북일보 기자 재직당시인 1978년 우리나라 언론기관에서는 최초로 국토확장과 식량안보라는 차원에서 전북의 서해안에 대단위 간척사업을 하자는 정책기사를 쓴 본인이다.
처음에는 편집국 동료들로 하여금, 황당무계한 기사를 쓰고 있다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는 고군산군도 야미도 섬이 고향으로 금강과 만경강 사이의 옥구 앞(비행장) 바다가 간조인 썰물에는 광활한 모래바탕이 보이거나 수로조차 수심이 낮아 어선(풍선)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일을 보아왔다.
이러한 일을 필자로서는 이 넓은 모래바탕을 육지로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이 새겨져 있어 기사를 쓰게 된 것이다.
대단위 간척사업 기사에 관심을 가져온 황인성 도지사는 1985년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되어감에 따라 정부 차원의 검토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와 농어촌공사는 다양한 계획수립 등을 진행하지만, 추진이 제대로 안되고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전북도민의 숙원사업으로 떠올라 있어도 진척이 없음에 대해 부안 이희천 국회의원(고인)과 김원기 국회의원(정읍․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이 협의 끝에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고인)과 민주당 김대중 총재(제15대 대통령 고인)와의 영수회담 일정이 나옴에 따라 당 차원에서 새만금사업에 대해 담판을 내기로 입장정리를 했다.
김 총재는 영수회담에서 새만금사업 시행확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노 대통령은 1991년 2월 6일 전북을 찾아 관계 장관에게 새만금사업을 적극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사업시행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필자는 전북일보 현직에 있을 당시 농어촌공사 사장으로부터 경계해역 현지답사 요청을 받고 두 번이나 답사를 했다.
그것이 오늘의 비응도에서 야미, 신시, 가력도, 부안 대항리 까지 33.9km제방이다. 또한 추진과정에서 전북도 새만금 사업단 황점동 담당관과 함께 연안주민들의 동의서를 받으러 다녔다.
필자는 1990년 12월 전북의 미래에 대한 대 토론회에서 새만금에는 국제공항, 국제항, 최첨단과학단지, 고군산을 중심한 국제 벨트형 관광단지 등 4대 사업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새만금사업 이전에 옥구앞 바다 등에 간척사업을 하려는 계획은 수립했으나 오늘의 새만금사업 시행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으나 시발점에 대한 새만금사업은 최초의 전북일보 기사작성자인 김철규와 황인성 도지사, 김원기, 이희천 국회의원은 빼놓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기원의 역사는 사실이 생명력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