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 김철규 시인(전 전라북도 도의장)
제35회 백화의 대명사 인당(仁堂) 강정준(姜正俊) 1
사랑과 어진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를 심어준 인당 강정준 회장(1915~2001). 강 회장은 식민시대와 민족동란, 그리고 전후 복구와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겪으며 사랑의 철학으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교육 등의 발전에 한 평생을 바치셨다.
북일보 기자 시절 월명동 백화양조 회장실에서 만난 강 회장은 우선 외모로부터 인자한 모습과 정장에 깔끔스러움으로 반가이 맞아주시던 환한 이미지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일단은 덕인으로 보였다. “종교인으로서의 정신은 경건한 마음과 진실이 담긴 굳건한 자기적 양심과 의지가 절대적”이라는 말씀이시다.
당시 강 회장은 “이 시대는 산업화로 가는 시점에 와 있는 만큼 대한민국은 국력이 한데 모이고 산업역군들은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주류업계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고 술회한다.
단적인 예로 백화양조는 1960년에 1만석을 돌파했으나 1962년에는 절반 수준으로 떨어져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쌀값 폭등과 양곡 원료 재제주 금지 등으로 소규모생산을 해야 하는 바람에 특급청주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상승일로에 있었다는 것.
시중에는 특급청주 품귀현상이 일어나는 등으로 1963년 10월 특급청주의 상표를 수복(壽福)으로 바꾸어 판매를 시작했다. “수복이라는 명칭은 오래 살고 길이 복을 누리라는 뜻이 담겨있으며 ‘백화수복’으로의 명칭변경은 인기리에 팔려나갔다”며 상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심지어는 “백화수복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수복 애호가는 병째 구입, 마시는 소비자들이 많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수복은 원래 주전자에 술을 담아 데워 팔기 때문에 그렇게 마시는 경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전북기업 100년에 따르면 백화양조는 1963년 8월 정부가 공포한 양곡 원료 주류제조에 대한 제한조치로 청주 생산이 일시 중단되자 대응책으로 합성청주를 생산하는 한편 향후 대중주류로서 존립할 수 있는 희석식 소주에 눈을 돌리게 된다.
백화양조는 1964년에 김제 백구 부용양조장의 희석식 소주제조면허를 양수받아 김제 신풍리에 제조장을 갖추고 곧바로 백화소주를 생산, 판매하기 시작한다.
소주 생산과 함께 주정도 직접 생산하기 위해 주정제조면허를 취득, ‘백화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한다.
본격적으로 주정 생산에 들어갔으나 원료난에 봉착하여 수입당밀 등으로 생산해오다 1967년에는 일시 생산중단을 하게 된다. 백화소주는 공장을 군산으로 이전한 후인 1967년부터는 판매실적이 급증하는 호조를 보였다.
그러나 정부는 소주 소비가 늘어남에 따라 1970년 254개의 소주공장을 2년 만에 68개로 통폐합시켰다. 결국 소주 업계를 대표하는 백화소주를 비롯해 진로, 삼학산업, 광림, 금복주, 무학, 대선, 삼학양조 등 8개 업체가 소주 소비의 65.7% 이상을 점유하게 된다. 백화양조는 1966년 청주업계에서는 최초로 해외 수출을 시도, 서독에 백화수복 6.090달러어치 수출을 한다.
날로 번창하는 백화양조는 1973년 8월 정부는 기업공개를 단행하도록 한다. 정부방침에 따라 1주에 1,000원의 신주를 22만2,000주를 공모하여 기업공개에 이어 12월에는 주식을 상장한다.
당시에는 국내경제는 에너지 파동으로 물가폭등, 자재 구입난 등 경영에 심각한 국면에 빠졌다. 1974년에는 정부의 긴급조치로 소비가 위축돼 경영은 더욱 어려워진다.
백화양조는 경영쇄신을 단행, 강정준 사장을 회장으로 전무를 사장으로 상무를 부사장으로 하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강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