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박사·문학평론가·시인 양 영식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보통 500만 마디의 말을 한다지만, 글을 쓰는 데에는 자유의사인 자발성에서 이뤄진다.
인간의 능력과 특성인 말(로고스)과 글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성(humanity)의 본질이기에 바른 의사소통을 하고자 할 땐, 최소한의 오만에서 벗어나 겸허함을 지어야 할 것이다.
왜냐면 진솔한 삶의 진실을 품은 말과 글은 생각보다 표리(表裏)가 잘 드러냄에서 왜곡 뒤에 숨은 의미와 여백을 찾는 불안은 주의해서 다루지 않으면 자신에게 큰 상흔을 남긴다.
해서 의미 전달 및 반영은 물론 갈등 요소의 조정과 배려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귀와 눈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꼭 대비해야 하리라.
헌데, 유아독존적인 미디어 전문가 프로 이들은 글과 말을 통해 지배와 배제의 논리에 따라서 잔재주로 대중을 조종하고 복종케 하며 군중을 소외시키며 얻어 낸 오만의 표상은 때로는 살기마저 느껴질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됨에서이겠다.
예컨대 표현 없는 삶은 원시에로의 귀환이며, 기록 없는 역사는 전설의 메아리라는 점을 충동질하며 현혹과 조종으로 얻은 자신의 명성과 권위에 도취 된 전문가 이들에게도 순간적인 속임수로 대중을 압제한 그런 느낌의 망상은 쉽게 물거품이 될 수 있음에 귀 기울이어야 함에서다.
혹여나 얄팍한 지적 유희의 난무로 숭배와 경외심을 강요하거나 ‘펜은 총보다 강하다’ 또는 ‘잡범 같은 전직 대통령’ 등으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는 등 자기기만 적인 오불관언의 태도엔 일반 대중을 분노케 할 뿐, 일어날 눈의 팽창과 수축만이 되풀이될 터에서 강직과 청렴함은 더 요구되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이에 반한다면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 살아있는 셈이 아닐까 함에서 불교의 보시(布施) 중 언시(言施)에서처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지 않으며, 정선된 말을 아무리 한다.’ 할지라 해도 본질적인 ‘악’의 상투성으로 인해 우리의 언어생활은 오해와 곡해로 넘쳐날 뿐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실 진미진선(盡美盡善)의 본 상태로 돌아감이 중요하리란 책임의 중요성에서 <말과 글>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단지 9%의 ‘진(眞)’을 지렛대 삼아 91%의 ‘위(僞)’를 꿰맞춰 정신세계를 호도하는 인간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되는 지식으로선 절대적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리라는 상상이 가능할 터에서이다.
이의 의미는 오직 이기적인 자기 주관으로 환상을 쫒아 채우기만 할 뿐, 그 후 외의 모든 책임은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마는 우리에게 말과 글의 사용에서 스스로가 바른 자의식을 가지고, 언제나 건전한 의미와 해답을 찾아내는 사랑의 휴머니티(인간성)를 지닐 수 있도록 항상 변해야 하고 살아 꿈틀거려야 할 것입니다.
허구로 넘쳐나는 진실 세계의 미로(迷路) 속에 들떠 내몰리는 존재일 터인 우리에게 원석을 갈고 다듬으면 보석이 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글을 갈고 닦아, 절제(節制)하노라 하면 보석처럼 빛날 수 있는 상황의 끝에 다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데, ‘무위(無爲) 사상’에서 온 지인(至人)에의 길, ‘비움’ 철학이 지미지락(至美至樂)이라 한다면 마음속에 숨겨진 여백의 미(美)의 진실로서의 말과 글을 누가 ‘더’ 행하며, 일상 속에서 아름답고 절제된 삶을 향해 살아나갈 ‘인격’에 대한 심판은, 오직 <자신과 역사>만이 그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음에서이겠다.
다만 AI 시대의 변환점에서 선, 우린 ‘말과 글’에 대해 진솔한 마음을 가지고 높이 날아 소중한 사람의 품격(공감 능력)을 높이 펼쳐 낼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말과 글의 세상은 공감의 가치로서 조화롭게 통합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훈훈한 인간 본연의 근원으로 귀착하리란 생각은 확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