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 김철규 시인(전 전라북도 도의장)
제37회 백화의 대명사 인당(仁堂) 강정준(姜正俊) 3
인당 강정준 회장은 기업의 성공으로 육영사업에 관심을 갖는다. 돈의 가치를 뛰어넘는 육영사업은 민족의 쌈터를 건설한다는 삶의 철학을 이룩하려는 숭고한 뜻으로 여겨진다.
강 회장은 부부를 상징하는 정은학원이라는 이름부터 정신적 혼을 담은 것이다. 강 회장은 ‘보람 있는 인생, 참된 인간상, 자립하는 사람’이라는 숭상의 이념 아래 정은학원을 설립했다.
1977년 군산공업전문학교설립, 그 후 서해공업전문대학, 군산개방대학, 전북산업대학교를 거쳐 현재의 호원대학교로 육성 발전시켰다.
특히 강 회장은 전북에 야간대학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전북산업대학은 정규학부 4년제(주간. 야간)로 승격시켰다.
1970년대 말 나는 당시 전북산업대학 유현기 학장(고인)을 만나 학교 설립 정신이 무엇인가를 취재했다.
유 학장은 “설립자이신 강 회장께서 동경유학시절 자신의 주경야독이 얼마나 중요하며 인생의 바로미터를 제시해 줬는지 모른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시고 전북 도내 직장인들이 배우고 싶어도 야간에 배울 곳이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신 결과로 야간학부를 개설한 것으로 안다”고 들려준다.
유 학장은 “야간학부 학생 모두는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학교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엮어가는 주경야독의 모습은 너무도 대견스러웠다”고 한다.
이어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전주에서 오는 학생들은 자동차 편이 불편한데도 하루의 결석도 없이 출석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대학진학(학부 4년제)을 하고 싶었겠는가를 생각해보게 했다”며 “느낌의 여운을 남겨준 이들 학생은 얼마나 학문의 갈증에 목말라했을까를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전북산업대학은 2007년 호원대학교로 교명을 바꾸면서 산단의 구 캠퍼스에서 현재의 군산시 임피면 호원대로에 15만여 평의 대형 캠퍼스로 옮겼고, 학풍을 쇄신하는 학문의 전당으로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지성의 대학으로 발돋움했다.
현재는 5개 단과대학에 25개 학과와 30개 전공과에 6만6,000여 명의 재학생이 있다. 한동안은 전국에서 1만여 명의 학생이 호원대를 찾았으나, 인구감소와 지방대학이라는 점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감소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강희성 총장은 안타까움을 설명한다.
강 총장은 부친이신 강정준 회장은 ‘인생은 덧 없이 간다, 사망 당시는 잘살았다는 생각, 마음 편하게 간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부친의 평소 생활철학은 “남에게 거짓, 피해, 거짓되게, 과거 되짚어보는 마음으로 살아오셨다”며 이에 반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셨음을 강조한다.
병환에 계실 때는 학교에 흉상건립을 못 하게 하시고 지인과 친인척들로부터 받아놓은 차용증 몇백 장을 모두 소각시켰으며 그럴 돈 있으면 학생들 장학금으로 주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평소 부친께서는 ‘인간의 자세는 진실함이 있어야 하며 거짓과 위선적 행동은 금물임을 갖고 살아야 한다’를 자녀들에게 유언처럼 당부하셨다고 한다.
강 회장은 6남 7녀의 자녀를 뒀으며 강희성 총장은 막내아들로 부친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결국 2001년 호원대 총장으로 취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화양조는 강 회장의 가문을 떠났지만 호원대가 강 회장의 인생 철학을 담아 후진들에게 넘겨주고 있다.
강 회장은 아침 6시와 저녁 8시 하루에 두 번 예배를 올리는 지극정성의 기독교 생활에도 게으름이 없었다고 한다.
일찍이 장로로 취임해 2001년 4월 24일 노환으로 별세(87)해 호원대학교장으로 영결식을 마치고 호원대학교 후정에 안장됐다.
강희성 총장은 “선친의 숭고한 뜻의 유업을 잘 지켜나가겠다”고 다짐한다.
인당 강정준 회장은 돈과 권력에 앞서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사상’의 실천가로 후대의 표상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