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농경시대로부터 쌀은 생명선이다.
오늘날에도 농민은 농사에 매달려야 한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정부가 매입해 보관하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판매하는 쌀 수급조절을 하고 있지만, 정부 수매가와 관련해서는 오랜 세월 동안 농민단체와 정부의 사이에 줄다리기는 언제나 팽팽하다.
나는 1991년 6월 도의원 선거 당시 합동유세에서 쌀 수입반대를 위한 규탄과 함께 쌀 포대를 운동장에 내 던지기도 했다.
평소 농정에 대한 관심이 많은 나는 전북도의회 의장 재임 시, 스위스 제네바에서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쌀 개방협상회의)이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 정부가 쌀을 수입한다는 정책을 내놓는 등으로, 쌀 수입반대 규탄 집회가 전국에서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는 터였다.
1991년 12월 전북도의원 52명은 삭발을 하고 의회 본회의장에서 1주일 동안 밤샘을 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이 농민 다 죽인다는 규탄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고생이 많았기에 도의원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다.
특히 조상대대로 호남평야를 지켜온 농민들은 쌀 수입반대로 인해 “농민생존권은 누가 보장할 것이냐”는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쌀 시장개방에 대한 문제에 결론 없이 미뤄 오다가 김영삼 대통령에 이르러 1993년 12월 9일 쌀 시장개방 결정에 따른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그 사이 농민단체들은 격한 투쟁을 벌였으며, 당시 우리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표단은 쌀 수입반대 서명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 42일 만에 1.307만8.935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이를 갖고 대표단 18명은 스위스 제네바 협상 장소인 가트(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각료회의가 열리고 있는 본부에 전달하는 등 본부 앞에서 규탄대회를 가졌다.
이 과정에서 이경해 전북도의원은 제네바 현지에서 쌀 개방협상을 반대하면서 활복 자살을 기도하여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뻔했다. 쌀 개방협상은 이토록 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겨우 생명을 건진 이경해 의원은 급거 귀국했다.
우리 전북으로서는 호남평야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전개했으나 결국 쌀 수입문제는 개방되고 말았다.
쌀 개방정책에 이어 전북도에서 새만금사업 예산확보가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의장 취임과 동시 곧바로 전북도에서 1992년도 예산확보를 위한 노력에 도의회 차원에서도 새만금 국가예산확보에 나섰다. 우선 정부안에 국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 통과가 급선무다.
새만금 관할 구역이 지역구인 군산 김봉욱 의원, 김제 최낙도 의원, 부안 이희천 의원 3명이 있으나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국회의원은 부안 이희천 의원 한 명 뿐이다. 도에서 내놓은 예산 보따리를 안고 이희천 국회의원을 찾아간다.
이 의원은 “참 고생 많다”며, 여야 상관없이 예결위원 전원 방마다 찾아다니며 새만금사업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예산확보에 노력해 달라는 부탁하고 다녔다.
이 의원은 “특히 전북도의장이 맨 처음 전북일보 기자시절 서해안 대단위 간척사업을 주창한 오늘의 도의회 의장이라며 예산확보가 절대적”이라는 설명을 한다. 이러한 예결위원 방을 3-4차례 방문하여 못 만나면 다음 또 찾아가 부탁한다.
이처럼 예산확보투쟁은 1993년 새만금 예산확보에서도 똑같은 역할을 했다.
2년을 해온 역사였다. 이러한 예산확보를 위한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당시 이희천 의원은 “김철규 의장이 할 일이 아니라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할 일을 이렇게 하고 다니니 얼마나 공들이는 일이냐”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나보다는 이희천 의원에 대한 새만금 제방이 완공되면 이희천 의원 공적비를 세워주어야 한다며 가족과 보좌관 출신을 찾아내 의견을 몇 차례 주었으나 별다른 연락이 없어 몹시 아쉬웠다.
지금쯤 생각해 보면 군산·김제 국회의원의 무관심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사업이지만 지역구인 만큼 당연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마음은 아쉬운 일로 남는다. 내 경우는 새만금사업 성공은 나의 꿈이었으며 정치무대로 한 것도 고향이지만 그보다는 새만금사업 성공의 씨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 나의 근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