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1월 28일은 한반도에 새로운 역사로 기록될 새만금사업의 첫 삽을 뜨는 기공식이 거행된 날이다.
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농림수산부 장관, 국토부 장관 등 정부 주요 인사와 최용복 전북도지사, 김철규 전북도의회 의장을 비롯한 지역 각계각층의 주민, 관계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천지개벽의 종을 울렸다.
이날 기공식에서 나는 전북도의회 의장 자격으로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테이프커팅을 했다. 내 생애에 영원히 기록될 일이다.
1978년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로 전북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전라북도 서해안에 국토확장과 식량안보차원에서 대단위간척사업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해 정부는 1983년부터 검토하기 시작, 결국 국책사업으로 결정,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오늘의 새만금 사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이 됐으나 공약이행이 지지부진하는 양태를 보여 1991년 초 여야 영수회담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당시 야당 총재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원기 사무총장(전 국회의장)과 부안 출신 이희천 국회의원이 새만금사업 공약 이행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청와대 회담 담판으로 1991년도에 시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해역 결정이다. 당시 농어촌공사 이홍래 사장은 나와 함께 “경계선을 어디로 하는 것이 좋을지 해역을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물론 동행을 환영했다. 농어촌공사 배를 타고 서천 앞바다에서 고군산군도와 변산반도를 돌아보았다. 물론 나는 전북일보 재직 중이다.
그럼에도 내가 쓴 기사이면서 “새만금사업은 기필코 성공해야한다”는 나의 소망이기 때문에 “얼마나 좋은 일이냐”며 일정을 조정하여 함께 돌아보았다. 얼마 후 한 번 더 가보았으면 한다는 통보를 받고 2차 현지답사를 했다.
“비응도에서 고군산군도 신시도를 거쳐 변산반도로 연결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눈 뒤 가력도(당시 무인도 작은 섬)에서 고군산군도를 바라보았다. 이때 이홍래 사장은 신시도에서 거의 직선에 가까운 변산 대항리를 가리켰다.
나도 “비응도에서 야미도, 신시도, 가력도, 대항리로 연결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2차에 걸친 현지답사 결과는 오늘의 제방 위치가 최종결정된 것이다.
나를 대동한 것은 최초로 대단위 간척사업을 하자는 취지의 기사를 쓴 기자라는 점과 고군산군도인 야미도 섬이 고향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동행을 요청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1차 사업은 군산 비응도에서 변산 대항리까지의 33.9km의 제방사업이다. 비응도-대항리 양쪽에서 물막이 제방 공사는 시작한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환경운동 단체의 반대로 법원의 하급심에서 공사중지라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대법원의 최종심에서 공사를 지속하도록 판결이 나와 결국 20년 만에 제방완공을 보았다.
나의 주창은 국책사업으로 발전, 노 대통령 후보 공약사업이 됐으며 드디어는 1991년 기공식에 이어 2010년에 제방완공을 했다. 세계 최장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으며 새만금항만, 공항, 수변도시 건설, 대형프로젝트에 의한 공장들이 입주토록 되어있는 등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참으로 거룩한 사업으로 한반도의 지도를 바꾸어놓게 됐다. 아시아의 허브요 한반도의 별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서 언론의 힘이 얼마나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한 기자의 혜안이 그토록 중요한지에 대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뿐만이 아니라 제방에 가서 내측과 외측을 바라보면 “신천지가 조성되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방공사가 진행되는 과정, 마지막 물막이 공사, 제방의 아스팔트공사, 개통의 현장을 확인하면서 내 마음은 하늘을 찌를듯한 감정으로 휩쌓여 있었다.
오늘의 새만금사업은 언론인 생활 30년에 최대의 보람이요 업적이라고 자평한다. 새만금은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