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박사‧문학 평론가‧시인 양 영식
꿈과 자유를 포기한 현대인을 닮은 듯 아프리카 모리셔스 섬에서 멸종된 ‘도도새’는 400여 년 전에 원래 날 수 있었는데, 모리셔스 섬 천혜의 풍부한 먹이가 있는 자연환경에 익숙해지면서 날개가 퇴화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새를 15세기에 처음 발견한 포르투갈 선원들이 날지도 못하고, 도망가지도 못하는 이 새를 바보라는 뜻에서 ‘도도’라고 불렀으나 마침내 1681년을 마지막으로 도도새의 멸종 사건은 하나의 ‘의미 상실’이 되었으며 현대인에게 큰 슬픔을 남기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어떤 역할이 없어짐에서도 오직 자신이 정한 프레임과 기준에 삶을 맞춰 가며 산 이기심 곧 ‘나’의 의미가 사라진 줄도 모르는 오만 속에 무너지고 있는 현대인에겐 특히 ‘비혼과 저출산’이란 큰 이슈인 양극화의 인간 생존(번창과 번영)의 문제를 쉽게 포기한 현대인의 공동체는 곧 분열될 것이 확연하리라.
오늘날과 같이 물질문명이 가속화되면서 성장과 진보의 원리가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사상적 빈곤을 메울 새로운 대체 현상으로서 충전될 가치 현상인 세상을 밝힐 행복 <번창과 발전>과 삶의 목적이 될 이념, 종교, 민족, 환경 문제 등이 심각한 갈등으로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에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사회 문제를 해소하고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만들어야 할 시점에서 극단에 휩쓸리고 이기(利己)와 물질에 너무 집착된 부패 친화적인 문화는 욕심과 분노가 잃어 분별력을 잃게 됨에서 타인에게 기쁨, 숭고함, 만족감 같은 감정을 줄 정신적 자유가 될 수 없음에서 현대인 우리는 실망을 느끼어 냉소적 사고에 빠져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리다.
그렇지만 남을 위한 이타주의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영웅, 이상(理想)을 위해 생애를 던지는 성인으로서가 아닌 현대인의 삶은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한 의미와 가치를 다지는 평범함에 바탕을 두어야 함에서이라 하겠다.
헌데,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론한 삶의 목적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좋은 삶)이라 한 이 말이 사실 ‘행복’이란 말로 옮겨져 왔는데, 사실은 번창 또는 번성(fiourishing)이란 말이 더 적합한 말일 터에서이다.
요는 현대인에게 모범이 되라고 부추기기보다는 힘닿는 한계 안에서 최대한 타인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위해 고민하고, 지구 전체를 살피면서 겸손하게 살도록 이끌어 감에 의미가 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사실 사회와 사회 구성원 각각이 부패하여 경쟁력을 잃어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현대인 스스로가 날개의 깃털을 하나씩 뽑아내고 있음과 비견되는 현실의 안타까움이 일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도도새’로 상징되는 자유와 꿈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변화를 수용할 새 감각의 재생을 소생시켜야 함에서 현대인 우리는 삶에 역행하는 폐습에서 행복을 느끼는 데엔 둔감해지며 불행을 느끼는 데는 과민해지고 있음에서 어떻든 <동(動)과 정(靜)>의 균형된 세상과 상태를 유지하려면 양심재정(養心在靜) 속에서 지적 탐구와 사색으로써 높아진 방어기제를 올바르게 승화시켜 낸 후, 지성이 형성돼야 함에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의 안전조건의 행복 공식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결론으로서 현대인들에게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교훈적인 메시지란 곧 효용이나 이윤의 극대만을 추구할 뿐 <자연을 인간의 삶 속으로 녹여 내지 못함>에 있다고 전제한다면, 문명의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 손끝 하나로 전달할 수 있는 디지털 세상의 압축된 시간 덕에 생활이 여유로워졌다는 생각은 오히려 현대인에게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해야 할 차가운 맑은 빛이 되고 있음이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