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한순간 속에 몸부림치는 군상들이 모여 살아가는 공간의 세상만사 제행무상(諸行無常), 영원치 않음에도 필연과 우연의 현상이 요동친다.
때론 동기부여가 지나치면 마음은 차고 넘쳐 죽음의 공포와 삶에 대한 갈망으로 일시(一時) 성(性)이 은유될 세상사를 조감하노라면 생각의 다름에서 오는 현상의 생멸(生滅) 흐름에 쓸려지는 사이, 시각은 그 어디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으리다.
사실 세상사 영원할 것 같지만 우연과 필연의 철학 세계에선 사건의 ‘인과성과 불가피성’이 핵심개념으로 대립 되거나 상호 간 설명되는 쓰임으로서의 ‘우연’은 특히 통제 예측이 어려움으로 ‘필연’은 원인과 결과가 연결된 사건을 뜻 하지만 꼭 우연이 필연 속에 종속되는 건 아니란 생각은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으로 이어지는 것일 터라 하리라.
그래도 하나의 현실은 이해관계와 무관 된 사실들로서 변함없겠으나 인간미는 순진무구함을 대가로 하나의 작은 분수령을 거치며 삶의 불가해함을 알게 해줄 심상(心狀) 저쪽으로 흘러가 불가해한 수수께끼로서 새로운 마음의 강을 이루며 오늘이란 문명의 시간 속으로 한결같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래서 우린 인간의 힘과 시대 환경이 혼재된 결과의 결정체를 때때론 필연으로 또는 물리적 심상적인 흐름의 우연한 결정들이 모여져 사회의 물줄기가 이루어지는 중에 다양한 색깔들로서의 오욕칠정, 생로병사와 선악 정사가 펼쳐짐은 물론 얽히고설키어 혼동된 다양성 담론의 두 개념이 혼합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으리다.
그래서 우연과 필연의 역설적 소용돌이가 될 정신적 갈등의 결정체는 가끔 우연과 필연인 사랑의 늪에서 때론 헤어나오지 못하는 남녀가 있는가 하면, 아픈 마음의 굴레로부터 못 벗어난 상처 그 속에서 살아갈 터나 인간은 더 밝고 맑은 세상을 더 맑게 살아가기 위해 먼저 상대의 편에서 생각해 보라고 한, 계명의 ‘역설적인 잠언’이 민주화 중심 스위스 적십자사 현관에 걸려 있음에 또한 감탄하리다.
그 내용은 ‘What you do not want done to yourself, do not to do others, James Legge’, 바로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의 명구로서 우리가 되새겨 볼 역설의 공존들로 자유 의지와 시대의 양상에 따라 경향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정약용 선생의 가르침인 ‘수레의 겉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우냐의 본질과는 상관없음을 의미한 담론과 같음에서이겠다.
사실 ‘남을 배려하고 존중함’의 덕이 어려서부터 싹튼 배려의 응시에서 온 미덕이기에 온갖 잡념을 다 버리고 명경지수와 같은 관조의 경지에서 세상의 분노와 애증, 갈등과 비애로 채워진 번뇌 속에서 오직 ‘비움’의 선경(仙境)에 도달할 선행을 쌓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함을 돌아보게 한다.
의도적인 계획을 세워 ‘비움’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사람을 만드는 기본이라고 하는 믿음의 생각을 하기 전에 자식들에게 효도를 받고 싶다면 어려서부터 남을 배려하는 마음(역지사지=易地思之)을 가지도록 효행을 쌓아가는 게 중요할 것이기에 처음부터 마음에 차는 일을 실행함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더하여 옛 고사(古史)에서 제자 자공이 공자님께 한마디로 평생토록 행할만한 게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하니 아마도 서(恕)일 것이다’한 그 ‘서’란 곧 자기가 하고자 않할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 곧 우연과 필연을 넘어 선과 같음에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건 당연히 남들도 하기 싫다는 뜻으로서 자기 생각만 하지 말고 상대방의 편에서 생각을 해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이라 하겠다.
결론으로서 이제 인간 세상에서 필연적인 실체 담론 그것도 때론 성숙의 통과 의례가 되고 뿌리를 설계해주는 기회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하겠으나, 후회하지 않을 현실의 긍정성 즉 현재를 살아내려 하는 시각의 역설적인 삶의 맥락과 의미를 만드는 원천은 언제나 현재이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미래를 예견해낼 욕망이란 ‘지금, 이 순간에 있음’을 기억하고 역설적인 삶의 덕목 가치인 우연과 필연을 넘어선 응시의 통섭 가치는 매우 중대하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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