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
2019년 가을, 정년퇴임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의 초조함을 달래려 금강 너머 청양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운명처럼 면암 최익현 선생의 초상화와 마주하게 됐다. 한참을 말없이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에게 학예사는 뜻밖의 이야기를 건넸다. 이 초상화가 군산의 한 한약방에서 발견돼 청양군이 인수하게 됐다는 설명이었다.
군산에서 청양까지 이어진 이 작은 유물의 궤적을 풀기 위해, 나는 향토사학자로서의 집념 어린 추적을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군산 미원동에 위치한 ‘중일한약방’을 찾아 원장 장희옥 선생을 만났다.
장 원장은 자신의 조부가 독립운동을 했던 장진욱이고, 선친이 한문학자 장인수라는 사실 외에는 가문의 내력에 대해 언급을 피했다. 베일에 싸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 나는 호남 의병사의 흩어진 퍼즐들을 맞추어 나갔다.
장 원장의 조부인 호암 장진욱은 습재 최제학과 함께 정산(청양)에서 동문수학한 막역한 동지로서, 면암 선생이 의병을 창의할 때 목숨을 걸고 동참했던 인물이었다. 면암 선생이 대마도에서 순절한 후, 습재는 당시 정산군수이자 고종의 어진을 그린 어진화사였던 석지 채용신에게 면암의 초상과 압송도를 그리게 했다. 이 초상화는 스승의 혼을 모신 위패 그 자체였다.
습재는 본가인 진안 삼우당에 장차 독립이 되면 스승의 영당을 모실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 기간 동안 스승의 초상을 가장 신뢰하는 동지인 호암에게 보관토록 했다.
호암은 1906년 의병을 일으키기 직전, 일경의 삼엄한 눈을 피해 스승 면암 선생을 진안 삼우당에서 정읍 무성서원까지 밀착 호위하며 야간 이동을 감행했던 인물이었다. 제대로 된 길조차 없던 시절, 목숨을 걸고 스승을 보필했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군량을 조달했던 진짜 의병이었다.
광복 전 호암이 서거하자 이 엄중한 초상은 아들 장인수에게 대물림되었다. 광복 후 장인수가 군산으로 이주해 ‘중일한약방’을 개업하면서, 면암의 초상과 압송도가 비로소 군산 땅을 밟게 된 것이다. 그의 아들 장희옥 원장까지 3대째 면암의 초상을 안방에서 묵묵히 지켜온 셈이었다.
나는 장 원장에게 ‘습재실기’에 나오는 조부의 생생한 독립운동 기록을 펴보이며 독립유공자 대상임을 설명했다. 그리고 2021년 1월 21일, 역사적 증거들을 모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를 제출했다.
마침내 2023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호암 장진욱 선생에게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우연한 인연으로 시작해, 1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역사 어둠 속에 묻혀 있었던 영웅의 이름이 다시금 찬란한 빛을 보게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비록 손자 대에 이르러 이 초상화와 압송도의 국보급 가치를 깊이 알지 못해 청양군에 매각된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지만, 무성서원에서 깃발을 올린 의병 창의의 불꽃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면암 선생을 모시고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옥구읍 출신의 돈헌 임병찬 의병장은 생전에 스승의 사우 건립을 간절히 염원했었다.
최근 임병찬 의병장의 후손 모임인 ‘돈헌회’와 ‘옥구파 임씨 종중’이 합심해 ‘돈헌 임병찬 선생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생가터에 독립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면암 최익현 선생을 주벽으로 모시고, 임병찬 의병장과 12의사, 그리고 호암 장진욱 등 호남의 위대한 의병들을 함께 배향하는 사우를 군산 땅에 건립하고 ‘임병찬 의병장 독립기념관’을 세운다니, 이는 전북특별자치도의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경사이자 진정한 ‘수성’의 발현이다.
<본 수필은 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