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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독립유공자 춘고 이인식 선생②

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

군산신문2026-08-10 10:33:43 링크 인쇄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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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

  

임피중학교 정년퇴직을 20일 앞둔 196228, 선생은 5·16 혁명정부에서 공채를 상환해 주려고 법제처에서 법안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선생은 그 돈이 나온다 해도 결코 사비로 쓸 생각은 없었고, 임피중학교의 장학금으로 기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유당과 민주당 정부가 약속을 이행치 않았듯이 혁명정부 역시 공채 상환 법안 상정을 차일피일 미루며 끝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선생의 나이 19세에 구국의 일념으로 토지를 전부 바쳤건만 노 독립운동가의 말년은 지독히도 빈한했다.

   

임피중학교 재직 시에도 제자들을 위해 가진 것을 다 털어주었기에 1962228일 퇴직 후에는 거처할 집조차 없었다.

   

퇴직 이듬해인 1963112, 조카인 이병관(독립유공자)이 마련해 준 서수 집’(서수리 774번지, 572)으로 이사했으나,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별세하고 말았다.

   

선생이 거처했던 그 서수 집은 세상을 떠나신 지 1년 뒤 타인에게 넘어가 현재는 폐가로 방치돼 있다.

   

임피중학교 제자이자 옥구농민항일항쟁 유족회회장이었던 문병준 전 시의원은 스승의 마지막 길을 이렇게 회고했다.

   

“20대 시절, 선생님이 살던 서수 집과 300m 거리에서 살았다. 선생님의 병환이 궁금해 찾아갔더니 제 어머니 안부를 물으시며 마늘을 구워 드리라고 조언해 주셨다. 그러고는 어려운 부탁을 해야겠다며 쌀이 있으면 좀 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집에 왔지만, 병고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선생님의 부탁을 깜빡 잊고 말았다. 한 달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선생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께 죄를 지은 것이 늘 마음속에 한으로 남아있었다. 1990년대 초 광복회 전북지부에서 선생님 동상을 참배할 때, 3포대를 기단 아래 바치고 지난 일을 고백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임피중학교 제자였던 송봉규 고문(춘고 이인식 선생 기념사업회) 역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선생님께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돈이 없어 군산의 진내과와 익산의 김외과에서 외상으로 치료를 받으셨다. 장례를 마친 후 며느님이 치료비 외상값을 갚기 위해 두 원장님을 찾아갔으나, 두 분 모두 극구 사양하며 돈을 받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춘고 선생은 19623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3321일 별세하자 전라북도 사회장(위원장 김인 전북지사)으로 5일장을 거행한 뒤 고향 선영에 모셔졌다.

   

이후 19741017,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제151호로 이장돼 안장됐다.

   

선생의 장손 고(故) 이일곤 선생(전 한국감정원 대전 부원장)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20년 춘고 선생이 독립군자금으로 헌납했던 토지는 총 81만3,364㎡(24만6,474평; 대지 4,646평, 답 22만3,161평, 전 1만8,667평)에 이른다. 1평(3.3㎡)당 토지 가격 10만~20만 원으로 단순 환산하더라도 약 250억~50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지금까지도 유족들에게 공채 보상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월명공원 춘고원에 세워진 동상 하나로 국가의 보상은 이미 끝났다고 언급하는 사이비 향토사학자들도 있다.

   

생각 같아서는 시에서 건립예정인 상상도서관의 도서관명을 천추에 길이 남도록 춘고 이인식 도서관이라 명명했으면 참 좋겠다.

    

<본 수필은 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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