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호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오늘날 농촌의 위기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인구 감소와 고령화, 일자리 부족부터 떠올린다.
청년들은 도시로 떠나고 학교는 문을 닫으며, 빈집과 묵은 논밭은 해마다 늘어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농촌을 살리겠다며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농촌을 쇠퇴하게 만드는 원인이 경제와 인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빈집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쌓인 불신이며, 낡은 시설보다 더 심각한 것은 공동체 내부의 분열이다.
농촌은 서로의 집안 사정까지 알 만큼 가까운 사회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웃이 먼저 달려오고,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던 공동체였다.
하지만 가까운 관계는 때로 장점이 아니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오랜 감정과 이해관계가 얽히고, 공적인 문제마저 사람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판단되는 일이 생긴다.
무슨 일을 했느냐보다 누가 했느냐가 중요해지고, 내용이 옳은가보다 어느 편에 서 있는가가 먼저 평가된다.
나와 가까우면 잘못도 감싸고, 내 편이 아니면 좋은 일조차 의심한다. 확인되지 않은 말이 사실처럼 퍼지고, 비판과 비난의 경계도 무너진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주민들은 점차 침묵한다. 괜히 의견을 냈다가 공격받을까 두려워하고, 지역 일에 참여하면 어느 편 사람으로 분류될까 걱정한다.
결국 양심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고 목소리가 크거나 관계망이 강한 사람들만 지역의 중요한 결정을 주도하게 된다.
지역을 위한 단체나 주민사업도 마찬가지다. 누가 오랫동안 봉사했고 어떤 성과를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협력할 사람과 제거해야 할 사람을 먼저 구분하고, 자신들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소문과 비방으로 고립시키려는 일이 벌어진다.
지역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공동체를 연결하는 다리가 아니라 세력을 나누는 경계선으로 변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주민들이 이러한 모습을 오랫동안 보면서도 “농촌은 원래 그렇다”고 체념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불신과 비방, 편 가르기는 농촌의 전통도 문화도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잘못된 관행일 뿐이다.
공동체에서 비판은 필요하다. 공공사업과 주민단체는 투명해야 하며, 잘못이 있다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비판은 사실과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사람을 먼저 적으로 규정한 뒤 의혹을 만들거나,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퍼뜨리고, 개인의 명예와 조직의 존립을 흔드는 행위는 정당한 감시가 아니다.
특히 인구가 적은 농촌에서는 몇 사람의 말과 행동이 공동체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역의 직책을 맡은 사람일수록 말과 행동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직책은 주민 위에 서는 권한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더 많은 책임을 부담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행정 역시 “주민들끼리의 갈등”이라는 말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공공사업과 주민조직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절차가 공정했는지 살피며, 대화와 조정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갈등을 방치한 채 목소리가 큰 쪽의 주장만 받아들인다면 행정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또 다른 편향이 될 수 있다.
지금 농촌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건물만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며, 공적인 일을 개인의 감정이나 세력 다툼과 분리할 수 있는 공동체의 양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상대를 쓰러뜨려야 내가 이긴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 사람과 한 단체를 무너뜨린다고 지역이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렵게 쌓아온 경험과 신뢰, 주민의 참여 기반만 사라질 수 있다.
농촌을 살리는 첫걸음은 더 많은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지 않고 옳고 그름을 사실에 따라 판단하는 것,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도 지역의 미래를 위해 대화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농촌 공동체의 회복은 시작된다.
다음 글에서는 주민을 대표한다는 자리가 어떻게 봉사의 자리를 넘어 일부 사람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진정한 주민자치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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