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호 (사)서수면사람들 이사장
주민자치는 주민이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논의하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다양한 주민이 참여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정하며, 그 결과에 공동으로 책임지는 것이 주민자치의 본질이다.
그런데 농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주민자치라는 이름과 실제 모습 사이에 적지 않은 거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주민 전체를 위한 자리가 어느 순간 특정한 사람들의 자리가 되고, 봉사를 위한 직책이 영향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변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농촌에는 마을과 면 단위의 수많은 조직이 있다. 주민자치위원회, 이장협의회, 발전협의회, 추진위원회, 운영위원회 등 명칭도 다양하다.
이러한 조직은 주민의 의견을 행정에 전달하고 지역사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소중한 기반이다.
문제는 조직 자체가 아니라 운영 방식이다.
같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여러 단체의 주요 직책을 번갈아 맡고, 한 조직의 임기가 끝나면 비슷한 목적의 다른 조직을 만들거나 그곳의 핵심 자리를 다시 맡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주민대표는 바뀌지 않고 조직의 이름만 바뀌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오랜 경험과 봉사 경력을 가진 사람이 계속 지역 일에 참여하는 것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농촌은 일할 사람이 부족하고, 경험 있는 사람의 역할도 필요하다. 그러나 경험이 독점으로 이어지고, 직책이 기득권이 되며, 새로운 사람의 참여를 가로막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주민대표의 정당성은 나이나 경력, 목소리의 크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주민의 의견을 얼마나 폭넓게 수렴했는지, 의사결정 과정을 얼마나 공개했는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도 동등한 발언권을 보장했는지에서 나온다.
그런데 일부 농촌사업에서는 회의가 언제 열렸는지조차 주민들이 알기 어렵고, 사업계획과 예산에 관한 정보가 소수에게 집중되기도 한다.
어떤 기준으로 위원이 선정되었는지, 누가 무슨 권한으로 결정을 내렸는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주민의 의견을 묻는 절차가 이미 결정된 내용을 알리는 설명회로 끝난다면 그것은 참여라고 보기 어렵다.
몇 사람이 결정하고 다수 주민은 박수만 치는 구조라면 주민자치라는 이름을 붙여도 실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공적인 사업에 대한 문제 제기를 개인적인 도전이나 세력 싸움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사업의 절차와 예산, 운영방식에 대해 질문하면 “우리 편이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협조하지 않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일이 생긴다.
반대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문제는 감싸고, 관계가 불편한 사람이나 단체의 활동은 축소하거나 부정하려 한다면 주민조직은 공동체의 대표기관이 아니라 특정 관계망의 도구로 전락한다.
주민자치에는 견제와 교체가 필요하다. 주요 직책의 임기와 연임 기준을 분명히 하고, 위원 모집과 선정 과정을 공개해야 한다.
회의 일정과 참석자, 주요 의결사항도 주민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 관련 결정을 주도하지 못하도록 이해충돌 방지 원칙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반대 의견은 조직을 방해하는 소리가 아니라 잘못된 결정을 막아주는 안전장치다.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주민을 배제하면 당장은 편할 수 있지만, 결국 조직은 일부 사람들의 판단에만 의존하게 된다.
행정의 책임도 중요하다. 지방자치단체가 주민위원회나 추진조직을 구성하면서 외형만 갖추고, 내부 운영과 갈등을 전적으로 주민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
위원 선정과 의사결정 절차가 공정한지 확인하고, 정보가 특정인에게 독점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특히 국비와 지방비가 투입되는 사업이라면 “주민들이 알아서 결정했다”는 말만으로 행정의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
주민참여의 형식만 빌리고 실제로는 일부 인사의 영향력에 의존했다면 행정도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진정한 지역의 어른은 자리를 오래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다음 세대와 나누고, 새로운 사람에게 참여할 기회를 주며,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도 끝까지 들을 줄 아는 사람이다.
필요할 때는 앞으로 나서지만 때가 되면 기꺼이 자리를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주민자치는 몇 사람이 주민을 대신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제도가 아니다. 주민이 주인이 되도록 권한과 정보를 나누는 과정이다.
주민대표의 자리는 지역에서 힘을 갖는 자리가 아니라 더 많은 질문을 받고 더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자리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 지역의 각종 주민조직은 과연 주민 모두에게 열려 있는가. 중요한 정보와 결정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는가. 주민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연결하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경계를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은 서수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2016년 주민들의 참여로 시작된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은 지역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한 국가사업이었다.
그러나 주민이 시작하고 주민이 노력했던 사업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정작 주민조직의 역할과 권리는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음 글에서는 서수면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주민들이 무엇을 부담하고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준공 이후 주민의 자리가 왜 달라지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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