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식 문학박사‧문학평론가‧시인
인간은 두뇌로 생각하고 두 발로 걷는다. 생각은 채우는 일이요, 걷기는 비우는 일이다. 채움과 비움이 함께할 때 사람은 비로소 행복을 향해 묵묵히 나아간다.
짐승은 달리고,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며, 인간은 걷는다. 걷기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바람처럼 자신을 옮기는 일이다.
그래서 두 발에 의탁해 순례에 나선 이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모든 것을 발에 맡기고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내면의 소리가 들려온다고.
영혼의 순수한 그 소리는 욕망의 찌꺼기를 비워 낼수록 또렷해지고, 몸과 마음은 그만큼 가벼워진다.
칠레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연극 ‘디 아더 사이드’(손진책 연출)에는 나무는 뿌리가 있어 움직이지 못하지만 사람에게는 두 발이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뿌리내린 나무와 달리 우리는 갇힌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발을 가졌다. 이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봄이면 느티나무 새순 아래를 걷고, 여름이면 푸른 그늘에 안겨 나를 돌아본다. 가을이면 낙엽을 밟으며 호연지기를 읊고, 겨울이면 가지마다 핀 눈꽃을 올려다본다.
계절이 바뀌는 길 위에서 우리는 일상의 자유를 맛본다. 따뜻함과 차가움, 건조함과 촉촉함이 순환하듯 삶도 머묾과 떠남이 어우러진다.
다만 걷기가 덧없는 시간 보내기에 그치지 않으려면 본능과 감정을 다스리는 고요가 필요하다.
홀로 있음은 벗어나야 할 갇힘이 아니라 자유를 길러내는 고요가 될 수 있다.
고립과 자유는 맞서는 대칭이 아니라, 고요가 자유를 받치는 비대칭의 관계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혼자 설 줄 아는 사람이 더불어 걸을 수 있다.
관습적 판단을 바꾸면 희망과 기쁨을 지켜 낼 이야기가 보이고, 그 이야기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힘이 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두 발에 몸을 맡겨 보자. 비운 만큼 길이 채워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