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홍 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
1910년 경술국치의 비극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제에 빼앗긴 바로 이듬해인 1911년(신해년), 온 국토가 일제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숨죽이고 있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 암흑의 한복판에서 황실의 종친과 당대 최고의 화사(畫師), 그리고 구국의 의병장이 유교적 충의와 항일 정신으로 깊게 교유한 거룩한 역사적 사건이 존재했다.
바로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 1851~1916) 선생의 초상화인 ‘돈헌 임공 영정’ 제작과 이에 더해진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의 친필 찬문이다.
이 영정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을 그린 한말 최고의 어용화사(御用畫師)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 선생이 정산에 머물 때 돈헌 선생의 거룩한 용안과 선비의 기상을 직접 정성껏 붓을 들어 전신사조(傳神寫照) 기법으로 그려낸 불후의 명작이다.
더욱 가슴을 울리는 것은 이 영정 상단에 적힌 찬문(撰文)이다.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이자 일제의 갖은 회유와 감시 속에서도 임시정부 망명을 시도하며 끝까지 항일의 지조를 지켰던 의친왕 이강은 ‘춘암(春菴)’이라는 호로 직접 친필 찬문을 남겨 돈헌 선생의 거룩한 충절을 목놓아 찬양했다.
“山嶽正氣忠義一身(산악정기충의일신)/名垂宇宙誰久誰新 (명수우주누구누신)”(큰 산의 정기와 충의가 일신에 배어 있도다. 그 이름은 언제나 새롭게 우주까지 오래도록 남을 것이로세)
일제의 눈이 사방에 번뜩이던 1911년에 황실의 왕자가 일제에 맞서 창의했던 의병장의 영정에 ‘산악 같은 정기와 충의’를 찬양하는 글을 친필로 남겼다는 사실은 목숨을 건 항일 결의이자 황실이 돈헌 선생에게 바친 최고 격식의 경의였다.
이는 돈헌 선생이 단순한 지역의 유학자나 의병장을 넘어 황실과 온 겨레가 흠모하고 의지하던 구국의 중심축이었음을 증언하는 정직한 사료다.
이 영정과 찬문은 훗날 1912년 고종 황제가 돈헌 선생에게 밀지를 내려 전국의 항일 역량을 결집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게 되는 결정적 역사적 복선이자 교량이 됐다.
황실과 돈헌 선생 사이의 깊은 신뢰와 충의의 혈맥이 있었기에 독립의군부는 총사령 임병찬을 중심으로 비서국 비서 임진(林鎭) 지사, 임피군 출신 통신국장 문형모(文亨謨) 선생 등과 함께 전국의 연대망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돈헌회’가 소중히 소장하고 있는 이 영정과 의친왕의 친필 찬문은 115년 전 이 땅의 선열들이 일제의 탄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서로를 알아보며 지켜냈던 숭고한 항일의 징표다.
우리가 돈헌 임병찬 선생을 기리고 그 가문의 3대 5명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완성하고자 하는 까닭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정리하는 데 있지 않다.
석지 채용신 선생의 붓끝에서 살아 숨 쉬고 의친왕의 친필 속에서 빛나는 그 ‘산악 같은 정기와 충의’를 오늘날 우리 군산과 호남의 자존심으로 다시 불태우기 위함이다.
그 거룩한 영정 속 기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선열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이 땅의 역사적 정의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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